박 대통령 '배신의 정치'
50년 전 아버지의 길로

[청와대 일기 34] 피해자도 수용 못한 합의, 대통령의 '말'을 복기한다

등록 2015.12.29 17:08수정 2015.12.2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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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출입하는 정치팀 이경태 기자가 기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청와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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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상 기념촬영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5.11.2 ⓒ 연합뉴스


배신의 정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주셔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지난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정부협상 타결 이후 상황을 보면서 반년 전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을 강조해 왔습니다. 특히 지난 10월 일본 <마이니치> 신문 등과 한 인터뷰에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도 제시했지요.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고, 우리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조속히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양국 정부가 2개월 뒤 내놓은 합의안은 이렇습니다. 1) 위안부 문제가 군 관여 하에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입힌 문제임에 대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 2)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위안부로서 고통과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한다. 3) 한국 정부가 위안부 지원을 목적으로 한 재단을 설립하면 일본 정부가 10억 엔(100억 원)을 출연해 한일 양국 정부가 협력하는 사업을 실시한다.

특히 정부는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不可逆)적인 합의에 도달했다는 결론도 내렸습니다. 즉, 이제 더 이상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를 쟁점으로 논의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란 얘기입니다.(관련 기사 : '법적 책임' 비켜 갔는데, '최종 타결'이라고?)

위안부 문제의 책임 주체로 '일본 정부'가 처음 제시된 점, '망언'을 일삼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국 총리대신 자격'으로 사과한 점은 의미 있는 진전이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평가는 '패배한 협상'에 가깝습니다. 일례로 영국 <가디언> 지는 "일본과 미국의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피해자도 수용 못한 합의안인데 대승적으로 이해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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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남 외교부 제1차관이 29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 결과 설명을 위해 서울 마포구 연남동 정대협 쉼터를 방문해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길원옥, 김복동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그렇다면 이 합의안이 박 대통령이 제시했던 기준에는 부합할까요? 아닙니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29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우리들은 돈이 필요 없다, (우리가 요구한 것은) 공식 사죄와 또 법적 배상인데, 얼마를 주는지 그것은 원치 않는다"라며 협상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 피해자뿐인가요. 이종걸 더불어민주당(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5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청구권 자금 3억 원에 도장을 찍었던 제1차 한일굴욕협정에 이은 제2차 한일굴욕협정"이라며 "자세히 보면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본의 법적 책임과 명예회복,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한 3무 합의"라고 비판했습니다.

결국 피해자들이 수용하지도 못했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이 아닌 셈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기준을 제시한 박 대통령의 생각은 다른가봅니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메시지까지 발표해 이 합의안을 사실상 추인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정부는 협상 전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가 치유되는 방향으로 이 사안이 해결돼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지켜왔다"라면서 "일본의 잘못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개선과 대승적 견지에서 이번 합의에 대해 피해자 분들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밝혔습니다.

자신이 제시한 기준에 못 미치는 합의안에 대해 대승적으로 이해해달라는 말. 자신이 앞서 했던 약속에 대한 '배신의 정치' 아니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2006년 방일 당시에도 "일본이 한국 국민의 정서를 잘 배려해 그에 따른 행동을 할 때 해결될 문제"라고 위안부 문제 해법 기준을 피해자 및 한국 국민의 동의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합의는 자신이 국회의원 시절 동의했던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과도 다릅니다. 박 대통령은 2010년 8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측의 입법 조치를 촉구하는 서한에 자신의 이름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 진상 규명 ▲ 일본 국회 결의 차원의 사죄 ▲ 법적 배상 등이 포함된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안과 더 가깝습니다.

천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입장이라더니, 다시 거론 않겠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 했던 말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2013년 3.1절 기념사에선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9월 중국 <인민일보>와 한 인터뷰에선 "역사는 유구히 흘러 영원히 남는 것이라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끝으로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본 측 요구에 동의해줬습니다. 이는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을 이제 묻어두겠다는 꼴입니다. 또 이번 합의로 완벽히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는, "과대평가"가 아닐까요.

1965년 한일협정 사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에 1억 달러 이상의 상업 차관 제공"란 조건으로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 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제2공화국 당시 장면 총리가 23억 달러를 일본 측에 요구했던 것을 감안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입니다. 특히 한일 양국 정부는 당시 협정에서도 "모든 과거사 문제는 불문에 부친다"라고 합의했습니다. 이번 합의에서 '최종적·불가역적' 내용과 궤를 같이 하는 겁니다.

결국, 이는 두고두고 문제가 됐습니다. 더욱이 헌법재판소가 지난 23일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이 제기한 한일청구권협정 헌법소원에 대해 "심판 대상이 아니다"라며 각하 결정을 내린 것을 보십시오. 정부가 잘못된 협상을 벌여 정작 정당한 배상을 받아야 할 피해자들의 청구권 행사를 막아버린 꼴입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을 예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는 이날 <오마이뉴스>의 팟캐스트 <장윤선의 팟짱>에 출연, "저희가 진짜 이번 타결, 기자회견에 대해 분노해야 하는 것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게 배상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정부가 차단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 더 짚자면, 국회의원 시절 박 대통령은 정부의 졸속협상으로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빼앗긴 경우라면 정부 차원의 보상도 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습니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를 맡고 있던 2005년 1월 때 일입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신년 기자회견에서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빼앗긴 문제 등은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밝혀서 정부 차원의 보상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라면서 "당시 나라가 가난해서 그 분들의 돈을 경제발전을 위해 썼고 그 분들의 희생으로 경제가 발전한 만큼 우리 모두 그 분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박 대통령은 다시 같은 질문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이제 어떤 답을 할까요.
#위안부 합의 #박근혜 #아베 신조 #박정희 #한일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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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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