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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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락이 칩거를 깨고 1976년 조계사 2층에 있던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 사무실에서 전국신도회장 취임사를 하고 있다. 오른쪽이 전국신도회 조직부장을 맡고 있던 조카 이동휘 ⓒ 이동휘
한때 박정희 정권 2인자로 불리던 이후락(HR· 아래 존칭 생략)은 5·16 군사정변 후 치러진 1963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자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다. 그후 수년 간 비서실장을 지내던 HR은 3선 개헌 직후인 1969년 10월 주일본 대사로 자리를 바꾸게 된다.
하지만 박정희는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를 4개월 앞둔 1970년 12월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고 선거 총지휘권을 맡겼다. 1971년 대선의 성공과 1972년 5월 극비리 평양방문을 통한 김일성 면담, 2개월 뒤인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 발표로 HR은 박정희의 2인자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1973년 4월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소위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를 맞은 후 그해 8월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그해말부터 권력의 핵심부에서 멀어졌다(관련기사 :"DJ 납치는 애국심의 발로"라는 큰아버지 때문에... ).
그후 오랜 기간 자택에서 칩거하던 HR은 1978년 12월 국회의원 총선거 때 고향인 울산 울주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후 1979년 민주공화당의 국회의원이 되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 10·26으로 이후락은 박정희와 함께 동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이후락이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칩거한 후 1979년 민주공화당의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그 사이에는 제2의 윤필용 사건으로 불릴만한 일이 벌어졌다.
조카 이동휘의 권유로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맡은 HR이 재가불자운동(在家佛子運動)으로 전국 각 사찰과 시도에 신도회 지부를 만드는가 하면, 군대에 군법당을 만들고 일선부대를 방문하는 등 활동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다음은 HR의 가신 이동휘의 증언이다.
이후락 전국불교신도회장 맡은 후 전국 신도회 조직, 군부대도 방문
"HR의 특성은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한가지 일에 부닥치면 무서우리만치 적극성을 띤다. 반면에 한번 칩거에 들어가면 한없이 침묵한다.
대학생불교회로 활동하던 나는 1970년대 중반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당시 HR의 칩거가 길어지면서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HR에게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으로 활동할 것을 적극 권유했다. 스님 중심의 불교를 신도들이 포교하는 방식의 재가불자운동을 같이 하자고 했다. 집안내력이지만 HR도 불심이 깊었다.
그에 앞서 할일이 있었다. 당시 신도회장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이었다. 당시 신도회장은 신진자동차 김제원 회장이었는데, 한 날은 서울 퇴계로에 있는 풍전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HR을 위해 용퇴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의 요청에 생각해보겠다던 그는 몇 일후 나를 만나 '집사람이 조직을 넘기지 마라고 반대한다. 왜 HR를 진흙탕 구렁텅이로 빠뜨리려 하느냐'고 했다. 당시 김제원 회장의 부인은 서영희 유정회 국회의원이었다. 나는 '연꽃은 진흙에서 피는 것'이라며 설득했다.
결국 전국신도회 회장이 된 HR은 전국 각 사찰과 각 시도에 신도회 지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뿐 아니라 각 군부대에도 군법당을 만들고 군인들을 대상으로 불교 포교활동을 했다. 각 부대에는 속속 군신도회가 창립됐다. HR을 모시고 전방 군부대를 방문할때면 꼭 사단장이 참석해 불교 행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HR은 이외 재가불자운동으로 찬불가를 만들고 전국의 교도소를 방문해 위로하는 등 여러방면으로 활동했다. 나는 불교연예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여자는 가수 권혜경, 박상규, 차도균, 이은하, 백영규 등이었다. 연예인신도회장은 박상규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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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중후반 이후락(오른쪽)이 이동휘(뒷줄 가운데)와 함께 군부대를 방문해 사당장과 함께 불교와 관련한 보고를 받고 있다. 전국불교신도회장인 이후락이 군법당 건립과 군부대 방문을 이어가자 청와대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 이동휘
당시 활동 사진을 보면, HR이 군대를 방문해 사단장과 함께 보고를 받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외 많은 신도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도 다수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오히려 권력의 의심을 받기에 이른다. 수년 전 윤필용 사건 때 'HR이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듯이 불자운동이 다시 이런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동휘의 증언이다.
"전국 사찰과 시도, 군부대 방문이 이어지자 일각에서는 이를 순수하게 보지 않았다. 이후락이 불교를 빌미로 사조직을 만든다거나, 대통령을 꿈꾼다는 등의 말들이 나왔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은 차지철이었는데, 이를 가만히 보고 있었겠나. 정보기관에서 HR에게 경고를 주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모략이었다. HR의 신도회장도 나의 권유로 시작했고, 특히 HR이 박정희교 광신도라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밝힌 바 있는데 그럴 일이 있겠나. 특히 유신헌법하에서 어떻게 HR이 대통령이 될 수 있겠나. 아마 군부대를 방문한 것이 오해를 불렀던 것 같다.
당시 전국불교신도회 외 포교 활동을 하는 단체로는 무임소장관 구태회가 재단법인 이사장을 맡고 있는 대한불교진흥원이 있었다."
(대한불교진흥원과 관련해 한 불교 매체의 지난 2008년 12월자에는 구태회의 보좌관을 지낸 사람의 인터뷰가 보도됐다. 이 보도에는 "장경호 거사로부터 불교를 위해 써달라는 부탁과 함께 30억 상당의 재산을 헌납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불자였던 구태회 장관에게 법인 설립을 지시했다"고 되어 있다. - 기자 말)
이동휘는 "당시 HR은 억울한 마음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알리고 싶었지만 차지철 경호실장의 인의 장막으로 박정희 곁으로 갈 수가 없는 처지였다. 결국 HR은 전국신도회장 활동을 접게됐다"고 밝혔다.
이동휘는 HR이 전국신도회장을 할 당시의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현재는 중앙신도회)에 문의한 결과 HR은 1969~1971년 8대 신도회장, 1976년~1980년 11대 및 12대 신도회장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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