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문제를 공연으로 만든다?

공동체 아픔 치유하는 인천 남구 '학산마당극놀래'

등록 2015.12.31 11:42수정 2015.12.3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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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구의 행정동 스물한 곳에는 각기 문화동아리가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자신의 얘기뿐만 아니라 살고 있는 동네의 얘기를 대본에 담아 예술로 표현한다. 그래서 더욱 감동이다.

'학산마당극놀래'는 주민들과 전문가들인 예술 강사가 함께 마을의 역사를 비롯해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마당극(촌극)으로 창작해 경연마당을 펼치는 시민창작예술제다.


이 예술제를 주관하는 학산문화원의 박성희(51) 사무국장을 지난 22일 문화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구민의 문화 활성화를 위해 학산문화원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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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 학산문화원 사무국장. ⓒ 김영숙

남구는 문학산을 중심으로 선사시대 이후부터 인천의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였다. 학산서원·도호부청사 등, 역사문화유산과 여러 무형문화재가 산재한 지역이기도 하다.

문화의 산실임에도, 남구에는 문화를 대표할만한 실질적인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뜻 있는 원로와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돼 지난 2003년 학산문화원을 비영리 특수법인으로 만들었다.

'지방문화원진흥법'에 의거해 설립했으며, 남구와 인천시의 지원으로 운영된다. 조직체계로 보면, 학산문화원(본원)에 딸린 기관들이 있다. 학산문화원이 직영하는 학산소극장, 위탁한 영화공간주안과 주안영상미디어센터다.

학산문화원은 설립 10년째인 재작년부터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설립했을 때는 문화 관련 단체가 많지 않아 문화원에서 펼치는 프로그램이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그 후 도서관이나 주민센터에서 평생학습이나 취미교양 강좌가 늘어, 희소성이 떨어졌다.


창립 10주년을 기점으로 '환골탈태' 중장기 전략을 수립해 '오랜 미래, 마당문화예술 생태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오랜 미래'는 '오랜' 전통과 문화유산에 남구 주민들의 창의적 상상과 실천이 더해 남구다운 '미래'를 만들자는 것이다.

'마당문화예술'이란 '하는 이'와 '보는 이'의 경계를 넘어 공동체 문화예술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마당'을 주민들이 문화 향유와 창작의 주체가 되는 문화예술 생태계를 지역공동체에서 구현하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시작한 게 '학산마당극놀래'다.

공동체를 회복하는 생활예술의 주민조직

"1970~1980년대 대학가에서 탈춤 부흥운동을 하면서 노동자·농민·학생이 각자의 현장에서 공동 창작을 했어요. 그게 마당극의 시초였죠. 서양의 커뮤니티 예술운동의 한국형 공동체 예술이라고 할까요? 주민들이 직접 작품을 만들고 현장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마당극이죠. 1990년대 이후 소멸됐는데, 우리는 전문가 중심이 아닌 주민들이 마을공동체를 만들고자 마당극을 시도했습니다."

2013년에는 남구에 있는 도서관을 중심으로 팀 예닐곱 개를 꾸려 시범 운영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면서 자기성찰의 계기와 이웃을 돌보는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다음해에는 21개 동마다 마당예술동아리를 만들었다. 마당예술동아리란 주민들이 예술 강사의 지원과 안내를 받아 다양한 표현을 배우고 음악·춤·노래·풍물·연극·탈춤·미술 같은 기초예술의 장르와 융합해 주민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표현하기 위해 공동창작을 하는 생활예술 주민조직이다. 주민들은 이웃과 마을이 겪고 있는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픔을 공유하고 치유해 공동체를 회복한다.

참가를 원하는 주민이나 주최 쪽에서 참가를 권유해 모인 사람들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8개월까지 주1회 2시간씩 모여 토론하고 작품을 만들고 연습한다. 작품은 10분 분량으로 형상화해 매해 가을에 열리는 주안미디어축제 기간에 발표했다.

자신의 이름과 자존감을 찾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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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개최한 ‘2015 학산마당극놀래’ 마당예술동아리 경연대회 한 장면.<사진제공·학산문화원> ⓒ 김영숙


동아리 활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만족해하며 다음 기회에도 참여를 원한다. 그만큼 참가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활동에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주안3동 기흥주택에 사시는 어르신들로 구성된 팀이 있었어요. 그분들이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제목으로 공연을 준비했는데, 끝나고 다 울었어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은 없고 누구의 엄마, 할머니로 살아왔는데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계속 물으니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찾게 된 거죠. 80대 어르신들이 연지곤지 찍고 다리도 성치 않은데 사람들 앞에 서서 공연하면서 자기존재감을 확인한 거죠."

주안3동에 있는 기흥주택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대부분 혼자다. 주로 계단 입구에서 서성이며 하루를 보낸다. 주택 담벼락에는 쓰레기가 쌓였는데 작년에 주변 도움으로 치우고 그곳에 텃밭을 만들고 평상을 설치했다. 그 평상 위에서 할머니들의 이름 찾기 여정이 시작됐고, 무대 위까지 올랐다. 이들은 올해 공연으로 '사미골 소리여행'을 준비했다. 주안3동 사미골에 전해져 내려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예술 강사와 함께 소리(창)로 만들었다.

"참가자들이 문화예술의 주인이 되고, 함께 마을공동체를 만들자는 취지로 사업을 기획했어요.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런 만큼 감동이 넘쳤습니다. 내재됐던 주민들의 변화에 대한 욕구들이 발현된 거라 판단합니다."

박성희 사무국장은 이런 과정을 통해 민주 시민으로 성장해 '문화민주주의'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용현1·4동도 마찬가지 사례다.

용현1동과 용현4동은 따로 있다가 2009년에 통합했다. 통합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드러났고 주민들끼리 등을 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올해 초 정월대보름 때 용현1동과 4동 주민들이 함께 지신밟기를 했다. 이것을 계기로 주민들 사이에 있던 벽이 허물어지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올해 '도깨비들의 난장'이라는 제목으로 풍물공연을 했다. 두 동이 통합한 이야기를 풍물로 난장을 펼쳤다.

생활문화를 온전히 이해하다

학산문화원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진행한 '2014년 생활문화센터 조성' 공모 사업에 선정돼 지원을 받았다. 인천에서 유일하게 학산소극장을 생활문화센터로 확대하기 위해 현재 증축과 리모델링을 하고 있다. 내년 3월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열 예정이다.

박 국장은 "공모 사업에 선정되는 데 학산마당극놀래가 큰 역할을 했어요. 이곳은 향후 남구 21개 동 생활문화의 거점 역할을 할 겁니다. 지금까지 학산소극장에서 쌓은 인프라를 연결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라며 "지난 11월 24일에 학산문화원에서 주관한 '마당 2.0포럼'이 열렸어요. 전국에서 생활문화공동체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학산마당극놀래가 생활문화를 온전히 이해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학산마당극놀래는 내년에는 주안미디어축제에서 독립해 마당극축제로 확장할 계획이다. 박 국장은 "지난 3년이 동아리라는 그릇을 만드는 시기였다면, 2단계로 앞으로 3년은 내용을 심화하는 과정으로 준비할 생각입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주민들을 문화적 리더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생활문화센터라는 든든한 공간이 생기고, 3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역에서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다양한 레퍼토리와 장르로 풍성해지는 학산마당극놀래, 내년 축제가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시사인천>에 실림
#학산문화원 #박성희 사무국장 #학산마당극놀래 #학산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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