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할 수 있다는 뻔한 말 말고 위로가 필요해요"

[명사의 서가 인터뷰] 뮤지컬배우 김호영을 이끄는 '희열의 맛'과 일상의 책

등록 2015.12.31 16:04수정 2015.12.3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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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파크도서 웹진 <북DB>는 뮤지컬배우 김호영과 지난 11월 10일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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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배우 김호영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독특한 아우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내는 독보적인 캐릭터. 뮤지컬 배우 김호영은 2002년 데뷔 후 지난 13년간 업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왔다. 공식적인 그의 직업은 뮤지컬 배우지만 공연기획과 개인사업까지 다방면에 뿌리를 내리는 통에 매일 바쁘다.


"뭔가를 참 많이 하죠. '호이'라는 이름을 브랜드화 시켜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는데, 카페, 토크쇼, 그리고 MD 상품을 제작하기도 해요. 최근에는 '주문 제작 도시락'을 런칭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좀 많아요.

그때는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열과 성을 다했는데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으니 지금은 교차로에 서 있는 기분이에요. 신호를 기다리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선택을 고민하는 그런 시기인 거죠. 그래도 저는 꼭 뭔가를 시도하고 잘 해내는 것만이 성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쩔 때는 과감하게 접고 포기할 줄도 아는 것이 나름의 성공이기도 하겠죠."

그는 2015년 11월 초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공연을 끝내고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로 무대에 올랐다. 두 가지 공연을 함께 준비한다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역할로 관객들을 맞이할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맨 오브 라만차>의 산초와 <거미 여인의 키스>의 몰리나는 정말 다른 역할이죠. 사실 연습과 연습 일정이 겹쳤다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워낙 결이 다른 작품이다 보니까 오히려 이 작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다른 쪽 가서 푸는 장점도 있었어요.(웃음)"

"한 순간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쉬어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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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배우 김호영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마누엘 푸익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에 합류한 그의 역할은 정치, 사상, 이념에는 관심 없이 소극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인물 몰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감옥 안에서 이성적이고 냉혈한 같은 반정부주의자 발렌틴과 한 방을 쓰는 몰리나는 가석방을 조건으로 발렌틴에게 반정부조직에 관련된 정보를 캐내라는 압박을 받는다. 자신의 목적을 숨긴 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영화 이야기를 통해 점차 가까워지는 두 사람이 어느 순간 서로에게 진심으로 끌리게 되면서 결말을 알 수 없는 전개가 시작된다.

1976년 스페인에서 책으로 출간된 <거미 여인의 키스>는 독특한 구성과 정치범과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내에서 판매가 금지될 정도의 문제작이었지만, 해외에서는 대성공을 이루며 이름을 알렸다.

매혹적인 표지의 여인과는 달리 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몰리나와 발렌틴이라는 남자 둘뿐이다. 금기시된 소재를 통해 억압된 사회를 고발하고자 했던 마누엘 푸익의 작품은 이후 영화와 연극으로 재현됐다.

그러나 김호영은 이번 역할에 있어서만큼은 최대한 연극 대본에만 의지한 채 감정을 쌓아간다고 말했다. 혹여나 소설을 모두 읽고 자신이 몰리나라는 역할에 무의식적인 제한을 둘 것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이 소화해낼 수 있는 감정을 찾아가보고 싶었다고.

"소설을 다 읽지는 않았고 영화를 먼저 봤죠. 영화를 괜히 본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개인적으로는 역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한 인물을 구현해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연극은 영화와는 조금 다르고 오히려 원작 소설에 더 가까운 느낌인데, 그래도 많이 다를 거예요. 마치 영화 <왕의 남자>의 공길과 원작 연극 <이>의 공길이 다른 것처럼요.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는 여러 소재가 들어 있지만, 결국은 사랑 이야기예요.

거미는 먹잇감이 거미줄에 걸려들면 형태는 그대로 두고 촉수를 이용해 안에 것만 쪽쪽 빨아먹는대요. 두 사람도 그렇죠. 겉으로는 그대로인 것 같지만 결국에는 마음속의 모든 것이 변해버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남자 단 둘이 이끌어가는 극인데다가 그가 맡은 몰리나 역의 심리 변화가 많은 작품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더욱 많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하지 못한 관객들의 반응에는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라며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극 전개상 굉장히 많은 의미를 지닌 장면인데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정말 당황스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전달을 잘못한 걸까? 사람들이 극을 따라가지 못했던 걸까?' 싶기도 하고. 장면 자체가 웃음으로 희화되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숙제 하나를 갖게 됐으니 더 큰 목표를 가진 셈 치고 열심히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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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영이 가져온 책들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몰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하던 중 그는 자신이 챙겨온 책 세 권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뜻 깊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 이야기를 듣고 고심 끝에 골라온 것들이란다. 그중 빨간 표지의 책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예전에 공연장 앞에서 예술가들이 열었던 플리마켓에서 직접 사온 책이에요. <애정놀음>이라는 제목도 독특했고 표지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화끈하잖아요?(웃음) 그리고 이 책을 파는 분이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알고 보니 직접 이 책을 쓴 작가였더라고요.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줘서 좋아하는 책이에요. 직접 제 SNS에 소개도 했어요. 이것 좀 보세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직접 책을 펴서 몇 편의 시를 읽어준다. 재치 있는 표현들이 마음에 든다며 마음을 환기 시켜주는 것으로는 이만한 책이 없단다. 몰리나에 대해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 앞에 가장 순수한 인물인 몰리나는 자신과 닮은 모습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가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저는 단 한 순간도 사랑을 쉬어본 적이 없어요. 그게 짝사랑일지라도 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거든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설렘과 기쁨이 제게 늘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아요."

짧은 시 안에 담겨 있는 응축된 정서는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힘을 언제나 처음처럼 상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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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직접 펼쳐가며 설명하는 배우 김호영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모든 일에 의욕이 넘치고 끼가 다분한 그를 보고 있자니,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몇몇 방송 프로그램에 그가 굉장히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왜 이런 끼를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건지 아쉬운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시기가 잘 안 맞았던 것 같아요. 데뷔 후 초반에는 그룹 가수 제의를 몇 번 받기도 했어요. 뭔가 어울리지 않아요?(웃음) 아쉬웠던 게, 어디 라디오 게스트에 나가거나 방송에 나가도 뭐든 뮤지컬로만 연결고리를 맞춰주시는 거였어요.

뮤지컬 배우이다 보니 그러셨던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거든요. 또 한 가지는 아마 많은 분들이 떠올리는 뮤지컬 배우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캐릭터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좀 이미지도 세고 독특하잖아요. 그걸 부담스럽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아쉬운 마음이 커질수록 더욱 더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을 바쁜 걸음으로 앞만 보고 걸었던 때에 잠시 숨 돌릴 여유를 주었던 책이 바로 에세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이다. 직장인 3년 차인 토끼 '설대리'가 겪는 직장생활의 이야기를 일러스트와 글로 풀어낸 책을 그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소개해줬다.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1시간이면 다 읽어요. 기발하고 재치 있고 한참 웃다가도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참 신기한 책이에요. 자기 전이나 이동하면서 틈틈이 읽기도 좋고, 짧은 글에 비해 주는 게 많은 책이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싶은 장면도 있다니까요."

그는 몇 번이나 책장을 넘겨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신이 나 있었다.

"사실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하면서 굉장히 예민해졌거든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나만큼 못 따라와 준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이게 왜 안 돼?'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참 반성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나와 상대가 생각하는 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건데, 왜 내 입장에서만 이해하려 했을까 싶고.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는 걸 인정하게 해주면서도 나와 같은 이들이 많다는 것으로 위로를 주는 책이라고 할까요? 그게 가능할까 싶죠? 그런데 그런 위로를 받았어요, 이 책을 보면서. 글은 짧지만 여운은 길어요."

"나를 무대로 이끄는 것은 '희열의 맛'...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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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배우 김호영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그는 최근 <호이스타일 매거진 쇼> 시즌1을 마무리했다. 스스로가 편집장이 되고 관객들이 에디터가 돼 매회 하나의 잡지를 완성한다는 콘셉트의 독특한 쇼를 기획부터 연출·진행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벌써 열두 번의 쇼를 진행했고 2015년 12월을 끝으로 시즌1은 막을 내렸다.

"사실 <호이스타일 매거진 쇼>가 성공적이었다는 말할 수 없어요. 어떻게 티켓 수익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그렇죠. 이번 쇼를 준비해오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제작자들에 대한 존경심이에요.

공연하면서 여러 제작사와 함께 일을 해왔는데, 그들의 대단함을 새삼 느꼈어요. 저는 원래 스태프 마인드가 강한 배우인데 요즘에는 특히나 더욱 그렇죠. 컴퍼니 팀장님들이나 실장님들 만나면 '대표님한테 잘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막 이러면서.(웃음)"

'호이쇼'의 시즌1 공연은 자선 콘서트로 막을 내렸고, 인터뷰가 진행된 그의 카페에서는 바자회가 열리기도 했다. 늘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언젠가는 이 마음들을 어떤 것으로든지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박수를 받고 살잖아요. 가끔 욕도 먹지만, 감사하게도 박수를 받아요. 내가 받은 따뜻한 격려와 마음을 나보다 조금 부족한 이들을 위해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어요. '호이쇼'를 진행할 때도 인지도가 낮거나 늘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으로 섭외를 해요. 저 역시 (옥)주현 누나나 다른 누군가가 저에게 기회를 주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참 고맙잖아요. 어떤 식으로라도 이 마음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말과 함께 그가 꺼내든 책은 <히말라야의 선물>이다. 커피콩을 재배하는 네팔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밀착한 에세이로 EBS 다큐프라임 <히말라야 커피로드>에 소개되기도 했다.

"제가 공정무역 '아름다운 커피' 홍보대사예요. 네팔에 대지진이 났었잖아요. 그 지역이 모두 커피 생산지였어요. 한순간에 그들은 생업을 잃은 거죠. 그리고 그들은 본인들이 수확한 커피콩이 다른 나라에서 5000~6000원에 팔리는 사실을 몰라요. 노동에 대가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일을 하는 거예요.

이런 생산과 무역 과정을 개선하기 위해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시작한 운동이 바로 '공정무역'의 시초인데, 지금 대기업이 운영하는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공정무역 메뉴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들이 운동을 한 결과죠. 바자회를 했을 때도 수익금의 일부를 네팔 지진 복구 성금으로 기부하기도 했었어요. 이 책은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고 일상을 소중히 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꼭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데뷔 후 13년의 시간. 관객들이 보내주는 박수와 함성 가득한 커튼콜의 희열은 그 시간 동안 그를 무대 위로 이끌어왔다. 그는 계속해서 맛보고 싶은 그 '희열의 맛'이 자신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무대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에요. 그런 기분을 주는 공간이죠. 커튼콜 할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아요.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무대 위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또 다른 나를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기도 하고요."

사람은 인생을 통해 누구나 각자의 책 한 권을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자신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다면 어떻게 완성하고 싶은지 물었다.

"전 아마 한 권으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웃음) 대하소설이 되겠죠. 언제 끝나나 싶을 때까지 이어질 걸요? <애정놀음>이라는 책처럼 색깔별로 내 인생을 담은 책을 낼 것 같아요. 그만큼 다양한 삶을 살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 삶을 책으로 만들 수 있다면 누군가 그 책을 읽고 용기를 얻게 되면 좋겠네요. '잘할 수 있어!' 이런 뻔한 용기 말고 '누구나 고민은 있어. 그러니 외로워하지 마'라는 위로와 용기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터파크도서 웹진 <북DB>(www.bookdb.co.kr)에도 게재됐습니다.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00

이 책의 다른 기사

소통이 가져온 전복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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