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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바닷가 달동네 목포 서산동의 골목길. 고샅 벽에 김선태 시인의 시 '조금새끼'가 걸려 있다. ⓒ 이돈삼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는 때이지요.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은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가운데 부분 생략)…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뒷부분 생략)…'
김선태 목포대 교수의 시 '조금새끼'다. 시인의 표현대로, 예나 지금이나 '조금새끼'라는 말 한 마디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있다. 온금동은 우리말로 '다순구미' 마을이다. '다순'은 따뜻하다의 지역말, '구미'는 바닷가의 후미지고 깊은 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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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달산에서 바라 본 다순구미 풍경. 오른편이 유달산 자락 온금동이고, 가운데 부분이 서산동에 속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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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달산의 산허리를 따라 도는 유달산 둘레길. 유달산에서 온금동 '다순구미'로 가는 길목이다. ⓒ 이돈삼
서럽도록 아름다운 사람들 '조금새끼'가 사는 다순구미(溫錦洞)로 간다. 지난 12월 16일이다. 유달산 노적봉에서 마을을 바라본다. 양지 바른 유달산 자락에 오순도순 모여 있다.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아리랑고개를 경계로 온금동과 서산동으로 나뉜다.
다순구미로 가는 발걸음을 유달산 둘레길에서 시작한다. 학암사와 옛 제2수원지를 거쳐 다순구미로 연결된다. 학암사는 조계종의 작은 절집이다. 제2수원지는 일제가 자국민들이 살던 지역에 물을 댈 목적으로 만든 급수원이었다. 주변에 벚나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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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금동 뒷산에서 바라 본 유달산 풍경. 노적봉에서 보는 유달산과는 색다른 풍경으로 펼쳐진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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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금동 뒷산에 있는 큰 바위. ‘慶尙道友會紀念會場’이라는 글씨와 함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이돈삼
낙엽이 수북한 길을 지나자 신안비치호텔과 고하도(高下島)가 내려다보인다. 고하도는 이순신 장군이 머물면서 수군통제영을 설치했던 섬이다. 고하도를 목포 북항과 이어준 목포대교도 위용을 뽐내고 있다.
둘레길에서 다순구미로 이어진다. 배추, 무가 심어진 텃밭을 지나니 장사바위다. 큰 바위에 '慶尙道友會紀念會場(경상도우회기념회장)'이라는 글씨와 함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21년에 새겼다. 1897년 목포 개항과 함께 멀리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증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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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금동 뒷산에서 내려다 본 '다순구미' 마을. 마을 앞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그 너머로 모이는 섬이 고하도다. ⓒ 이돈삼
장사바위에서 다순구미 마을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조금새끼'들이 사는 마을이다. 진도 조도, 완도 노화도, 신안 암태도 등 인근 섬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을 이뤘다. 전형적인 바닷가 달동네다.
슬레이트와 양철지붕을 덮어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벽돌을 굽던 조선내화 공장도 덩그러니 서 있다. 해방 전후부터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공장이지만, 지금은 텅 비어 을씨년스럽다. 근현대사의 풍랑을 고스란히 겪은 공장이다. 쇠락해져 가는 마을의 모습과 닮았다.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그 너머로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섬 고하도가 바다를 가로질러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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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새끼'들이 사는 다순구미 마을. 유달산 자락 끄트머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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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순구미 마을 풍경. 급한 계단을 따라 마을에 사는 어르신이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다. ⓒ 이돈삼
"좋은 동네요. 얼마나 따숩소? 겨울에 따숩고, 여름에 시원한 곳이여라. 여기가."
고샅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말이다.
마을 위로 난 고샅을 따라 걷는데, 여근석이 보인다. 높이가 10m쯤 되는데, 영락없이 여자의 음부를 닮았다. 오래 전엔 음부 가운데에 나무가 자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여근석 아래로는 텃밭이다. 배추가 파릇하다.
다순구미 마을에는 골목길이 촘촘히 나 있다. 좁은 골목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진다. 평탄한 길도 있지만, 가파른 길이 많다. '조금새끼'들이 고기를 잡으러 오가던 길이다. 아낙네들은 물동이를 이고 오르내렸다. 아이들이 뛰놀고, 연탄도 이 길을 통해서 배달됐다. 마을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이 길이 올뫼나루길이다. 올뫼나루는 등산진(登山津)의 우리말 표현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근거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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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순구미 마을 뒤 텃밭에서 만난 여근석. 겨울에 만난 바위가 더 쓸쓸해 보인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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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순구미' 온금동의 골목길 풍경. 집앞에 빨래를 널어놓은 풍경이 눈길을 끈다. 꾀죄죄하면서도 왠지 정겨워 보인다. ⓒ 이돈삼
고샅길이 안방과 부엌, 화장실 옆을 지나기도 한다. 벽은 헤지고, 슬레이트 지붕도 푸석거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그 골목에 빨래가 걸려 있다. '조금새끼'들의 체취가 배어있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만 같다.
코딱지만 한 텃밭에는 푸성귀가 무성하다. 몸 붙이고 살 비비며 살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려준다. 낡고 추레하지만 정겨운 풍경이다.
길에서 공동 시암(우물)을 만난다. 큰시암과 작은시암이 있다. 큰시암 옆에는 '김영수시은불망비'와 '정인호시혜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정인호는 물이 부족하던 1920년대에 마을사람들을 위해 돈을 내서 샘을 팠다. 우물정(井)자 모양을 하고 있다. 김영수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두 사람의 공을 잊지 않겠다고 마을사람들이 세웠다.
째보선창도 있었다. 주민들이 지게로 돌과 흙을 날라 만든 부두다. 배를 매어놓기 좋게 삼면을 막고, 한쪽 면만 열어놓은 ㄷ자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구순구개열 같다고 해서 째보선창이 됐다. 1981년 광주와 목포에서 함께 열린 소년체전을 앞두고 도로를 단장하고 넓히면서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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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순구미 마을의 큰 시암. 물이 부족하던 1920년대, 정인호라는 사람이 돈을 내서 판 공동 우물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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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의 온금동과 서산동을 가로지르는 아리랑고개. 오래 전에는 험한 고개였지만, 지금은 넓어지고 포장도 이뤄져 쉽게 넘어간다. ⓒ 이돈삼
다순구미의 올뫼나루길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 서산동 시화 골목길로 간다. 옛날엔 길이 가파르고 좁아 넘기 힘든 고개였다. 8년 전 뚫리고 넓혀진 도로 덕분에 지금은 가뿐하다. 도로변에 줄지어 선 먼나무의 진녹색 이파리와 빨간 열매가 아름답다.
'(앞부분 생략)…망망대해 나가면/ 움푹하고 볼록한 삶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다시 산기슭에 서 보면/ 그래도 그립고 정겨웠던 곳/ 갯바람으로 절인 비좁은/ 온금동 골목길/ 그 달동네가 그리울 게다' 강해자의 시 '온금동 연가'의 뒷부분이다.
'보고 싶다는 말/ 가고 싶다는 말/ 그곳은 사람이다// 결국은 닿고 싶은 따뜻한 가슴이다' 김혜경의 시 '다순구미 연가'다. 보리마당을 지나 남루한 골목에서 만난 시가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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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화가 걸려있는 목포 서산동의 골목길. 온금동과 함께 '조금새끼'들이 많이 살았던 마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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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길 계단이 급경사를 이루는 목포 서산동 풍경. 길을 따라 시화가 걸려 있다. ⓒ 이돈삼
길은 가파르다. 오르내리는 계단도 아슬아슬하다. 목포가 개항되기 이전의 모습 같다. 그 길에 집집마다 화분 몇 개씩 내놓았다. 꽃과 남새를 심은 화분으로 고샅을 단장한 그 마음이 애틋하다.
곰삭은 다순구미 사람들의 애환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오래 묵은 노래도 입안에서 내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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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서산동의 골목길 풍경. 험한 계단을 따라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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