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썩혀 먹는 술, 이것이 대륙 스타일

[허시명의 술 생각 ⑧] 아시아의 발효주는 어떻게 다른가

등록 2016.01.07 11:49수정 2016.01.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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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에 의미 있는 문화 공간이 생겼다. 지난해 11월 25일에 문을 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다.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옮긴 뒤로 그 공간의 쓰임새를 10년 넘게 논의하다가 생겨난 공간이다. 중앙국립박물관보다 규모가 더 크고, 예술극장과 어린이문화원·문화정보원 등이 있어 다채롭다. 얼핏 둘러봤을 뿐인데도, 다시 광주 시민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 극장 중 한 곳에서 나는 '아시아의 술 순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기회를 가졌다. 한·중·일 세 나라의 술, '해남 진양주' '일본 니이가타 청주' '중국 샤오싱주'(紹興酒)를 시음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술을 대하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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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시음한 한중일 술, 중국 소흥주, 해남 진양주, 일본 니이가타 술.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나는 술을 천착하면서, 술로 이름을 얻은 지역을 제법 떠돌았다. 우리나라에서 술로 이름을 얻은 고장으로는 홍주의 진도, 소주의 안동, 막걸리의 포천을 꼽을 수 있다. 근자에 주목받는 동네로는 한산 소곡주의 충남 서천, 오미자로 막걸리와 과실주와 맥주 제조장까지 생긴 경북 문경, 두견주와 막걸리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충남 당진을 꼽을 수 있다. 술을 자산으로 삼은 지역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에 견주면, 한국의 술은 아직 관광 자원으로까지 떠오르지는 않았다.

일본은 술로 특성화가 많이 돼, 다른 상품들과 견줘도 가장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은 상품으로 자리매김돼 있다. 술의 관광지로 고베의 나다, 교토의 후시미, 히로시마의 사이조 마을 들을 꼽을 수 있고, 니이가타의 사케노진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성공적인 축제도 생겨났다.

중국에서는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술 광고판이다. 술이 국가 기간 산업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마오타이를 생산하는 구이저우(貴州)성 마오타이진에는 1000개의 양조장이 있고, 쓰촨(四川)성 우량예(五粮液) 양조장에는 3만 명의 직원이 있으며, 8월에 산둥(山東)성에서는 칭타오 맥주 축제가 열린다.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술 마을이나 양조장들이 지역 음식과 지역 문화와 버무려져 관광 자원이 되고 축제가 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들어 교통과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지역의 경계가 희미해졌지만, 그럴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는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지역 축제를 열고 사투리나 특산물을 부각시키는 것은 그 때문인데, 이때 지역 명주가 있으면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술은 농산물의 가공 상품이고, 부피 대비 고가의 상품이고, 가방에 담기 쉽고 오래 보존할 수 있어서 기념품 가게나 면세점의 인기 품목이 돼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강연 요청을 받고서, 나는 '광주에서 어떻게 아시아의 술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다. 우선 광주에는 광주의 술이 없다. 김치 축제가 열리고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인정과 함께 넘쳐나지만, 광주를 대표하는 술이 없다.

서울의 장수 막걸리와 같은 계통의 무등산 막걸리가 있긴 한데, 광주 사람 누구도 그 술이 광주의 술이라고 자랑하는 걸 보진 못했다. 그저 광주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지, 광주 인근의 농산물이나 기법이 담기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도 있고, 또 한·중·일의 곡물 발효주(곡물을 재료로 발효한 그대로를 여과한 술)들을 나란히 놓고 시음하고 싶어서 광주에서 멀지 않은 지역의 대표적인 곡물 발효주인 해남 진양주를 시음 대상으로 삼았다.

진양주는 찹쌀과 누룩과 물로 빚은 황금빛이 도는 약주다. 진양주는 200년 전 궁녀 최씨가 궁궐을 나온 뒤에 영암 광산 김씨의 소실로 들어오면서 민가에 전해졌는데, 광산 김씨 집안의 딸이 해남 계곡면 덕정리로 시집오면서 해남 술이 됐다. 진양주는 경주교동법주와 더불어 약재가 들어가지 않은 한국의 대표 술로 꼽힌다. 약재가 안 들어가는데도 진양주나 경주교동법주를 약주라 부르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술을 약처럼 여겨온 전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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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치고유자와역에 있는 니이가타현 술 전시 시음장인 폰슈칸. ⓒ 허시명


시음할 일본 술은 니이가타현의 카쿠레이(鶴齢) 준마이긴죠(純米吟醸) 니혼슈(日本酒)를 준비했다. 니혼슈는 일본주의 일본식 발음인데, 일본 청주를 부르는 말로 통하고 있다. 즉 일본은 맑은 청주를 자국의 대표 술로 내세우고 있다. 니이가타 술은 1957년에 고햐쿠만고쿠(五百萬石)이라는 양조미를 개발하고, 눈이 많은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1980년대에 지자케(지역 술) 붐을 타면서 일본내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한국에서도 10년 전만해도 고베의 하쿠쓰루(白鶴)와 교토의 겟케이칸(月桂冠)이 인기가 있었는데, 요사이는 니이가타의 쿠보타(久保田)와 학카이산(八海山)의 인지도가 높아졌다. 니이가타의 카쿠레이 준마이긴죠는 알코올 15.5%로 진향주 16%와 엇비슷했지만, 술맛은 아주 담백했다. 시음한 참석자들은 진양주는 입안에 착착 감길 정도로 맛이 풍부하다고 호평했는데, 투명한 니혼슈는 향긋하긴 했지만 맛이 싱겁다며 평가하기를 주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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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의 즉묵노주 저장실의 오래된 술. ⓒ 허시명


시음할 중국의 발효주는 황주였다. 황주를 대표하는 술은 저장(浙江)성 샤오싱주(紹興酒)다. 황주라 했지만, 그 색깔은 황색을 지나쳐 거무스름하다. 알코올 15%의 샤오싱주를 맛봤더니, 한국 약주를 오래 방치해 묵혔을 때 나는 간장맛이 돌았다. 한국 약주 맛에서 간장맛이 돌면, 술을 조금 아는 이들은 술이 썩었다고 외면한다. 그런데 중국은 일부러 술을 세월에 맡겨 '썩혀서' 마신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 술맛을 이해하면 중국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산둥성 칭타오에 있는 발효주인 즉묵노주(即墨老酒) 제조장을 갔을 때, 항아리를 흙으로 완전히 봉해서 숙성시킨 술을 봤다. 그중에는 1949년에서 1959년 사이에 저장한 술 항아리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한국에서는 술맛이 상하지 않는다는 소주조차 오래 보관하는 걸 보기 드문데, 술맛이 상하기 쉽다는 발효주를 중국에서는 50년 넘게 보관하고 이를 상품화시키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약효' '향기' '세월'

한·중·일 세 나라의 발효주를 비교해서 맛보면서, 잠정적으로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곡물 발효주를 표현하는 이름이 달라, 한국은 약주, 일본은 청주, 중국은 황주가 대명사가 돼 있다. 술 색깔은 한국은 노르짱한 황금빛, 일본은 투명한 물빛, 중국은 짙은 황갈색을 띠고 있다. 술맛은 한국은 단맛이, 일본술은 담백한 맛이, 중국은 간장 맛이 주도한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약효'를 내세우고, 일본은 '향기'를 내세우고, 중국은 '세월'을 내세워 발효주를 상품화시키고 있는 점이 큰 차이다. 이렇듯 한·중·일이 추구하는 술의 기질이 다른데, 이는 기후 조건·생활 습관·음식 문화의 차이가 술에 배어든 결과이리라.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앞으로 여러 가지 연구 성과를 축적해 갈 테지만, 그중에서 술을 가지고 아시아인들을 바라본다면 아시아 중심축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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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강연장.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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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발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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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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