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관점, '소녀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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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민(cyberchannel)등록 2017.07.21 11:43
《반야심경》 첫머리에는,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 오온(五蘊)이 모두 비어 있음을 보고 일체의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났다."로 시작된다. 특히, '참나'를 깨닫기 위해 오온(五蘊)이 비어있음(皆空)을 깨달아야 한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오온(五蘊)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이다. 즉, '보는 나(色)', '느끼는 나(受)', '생각하는 나(想)', '행동하는 나(行)', '의식하는 나(識)'를 말한다. 이 다섯가지 요인들의 허망한 작용에 '나'라고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의 과정을 벗어나고자 오온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무아(無我)라는 진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연기(緣起)의 첫출발이다.

결국, 중생들은 오온이라는 '나'를 실제의 '나'로 착각하고 살아가지만, 실상 강에 비친 달이 실재하지 않듯이 오온은 공(空)이며 무아(無我)인 것이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은 이것을 의미한다.                      
  (*상기글은 전남대 철학과 이중표 교수의 「근본불교」중에서 발췌함)

풀이하자면, 중생인 '나'는 '참나'로 깨닫기 전까지는 오온(色,受,想,行,識)을 '나'로서 인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중생들이 모여 오온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인 유심연기(唯心緣起; 마음에서 비롯함)를 일으키며,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 사물의 무한한 상호작용)까지 더해져, 진리를 모른채 안개속을 헤메고 사는 것이 '나'이고, '우리'인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상하므로 덧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잡아함 302경》에서 세존은, "나는 모든 모순대립을 떠나 중도(中道)를 이야기한다. 여래의 설법은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此生故彼生)'는 것이니, 무명(無明)이 있는 곳에 행(行)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집기하는 것이며,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즉, 괴로움의 생성원인이 상호 인과관계에 있으므로 식(識)작용(;인식작용)전의 원인을 소멸시키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과정인 것이다. 이런 상호 관련성이 연기(緣起; 서로 연하여 일어남)로서 작용하고 연속적인 '업(業)'의 생성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12연기'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생성 · 소멸 과정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삶은 덧없음이 아니라 그 자체가 깨달음의 유의미한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도(中道)적 측면에서 업(業)을 어떻게 소멸시킬 것인가?

석가모니불은 깨달음을 얻은 후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며(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此滅故彼滅)"(《잡아함경》 제30권)고 했다.

복잡다단한 업이 연기하는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 침탈을 강행했다. 게다가 강제로 우리민족의 꽃다운 '처녀'들을 위안부로 데려가기조차 했다. 우리가 통탄해야 할 부분은 비단 이때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일본은 수십차례 우리나라를 침략했으며 '여인'들을 지속적으로 유린해왔다.

게다가,  고려시대에 원나라에 '공녀'조공이 있었고, 조선시대 청나라의 (병자호란)'부녀자'납치, 더욱 가관이었던것은,  호란이전 임진왜란 와중에 선조는 살육당하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소녀'는 '업'의 대상이었으며 갈갈이 찢겨진 상흔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 어떠한 왕조도, 하물며 근현대에 들어서조차 국가도 '소녀'를 지키지 못했으니 그 처절한 아픔이 '소녀상'으로 함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가슴아픈 민족의 '업'을 고스란히 짊어진 것이다.

그래서 '소녀상'은 우리민족의 뼈아픈 상처의 '상징'이며,  반복되는 '업'을 해결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의 표상이다. 곧, 단순히 3인칭의 '소녀'가 아닌 2인칭의 '너'이며, 1인칭의 '나'이기도 하다. 동일한 업을 부여받은 '나'는 즉, '우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 추운 겨울에 '거칠게 잘려나간 머리카락','꼭 쥔 두손','땅에 닿지 않은 맨발의 뒤꿈치'의 앳된'소녀'를 보고 있노라면, '나/우리'의 가슴이  져미어오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업을 어떻게 소멸시킬 것인가?

(악)업의 소멸은 작자(행위자)의 그에 상응하는 (선)업의 생성이 첫 출발점이다. 최소한 작자의 입에서  '소녀상'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업'을 소멸하는 자세가 아니다. 작자의 지속적이며 진정한 (선)업의 실천만이 소멸의 단서가 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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