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후 생협 주목한 고베, 여기서 '극일'을 꿈꾸다

['좌충우돌' 사회적경제 21] 일본 고베 '미즈호 협동농원'에 다녀오다

등록 2016.01.18 05:04수정 2019.01.2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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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생협의 신화

교토에서 고베 미즈호 협동농원으로 가는 길은 꽤 험준했다. 오사카를 지나자 저 멀리 창밖으로 높은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지도를 보니 일본의 국립공원인 룟코산 일대인 듯했다. 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인 아리아 온천이 자리하고 오사카, 고베의 아름다운 야경으로 유명하다는 룟코산.

정작 그 험준한 산세와 꼬불꼬불 난 산길을 보고 내가 떠올린 것은 일본에 오기 전 고베의 사회적 경제와 관련해서 찾아봤던 자료들이었다. 고베는 유독 협동조합과 인연이 많은 도시였다. 당시 내가 지나던 이 길 역시 협동조합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1995년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가장 큰 문제점은 도시의 도로와 항만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자동차와 선박들이 구호 물자를 가지고 고베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선 것이 생활협동조합 코프고베(아래 고베생협) 조합원들이었다. 그들은 배낭에 물과 구호품만 넣고 이 험준한 산을 넘어 고베 시민들에게 그것들을 전달했다고 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오로지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산길을 묵묵히 걸었을 고베생협 조합원들. 당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베 시민들은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베생협이야말로 자신들이 키워가야 할 조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베생협 매정 사진 좌측 하단의 여성이 전단지를 열심히 나눠주고 있다 ⓒ 이희동

 

그 때문인지 현재 고베생협은 효고현(주도 고베시) 전체로 봤을 때도 결코 적지 않은 규모였다. 2015년 3월 31일 기준 160여만 명의 조합원(효고현 인구 557만 명, 고베시 인구 155만 명)으로 단위 생협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세대 조직률로만 해도 50.4%에 달한다. 소매유통시장의 점유율은 약 20%이며 피고용자 수도 9651명(정규직 2429명, 계약직 1801명, 시간제 5421명)이다.  

이와 같은 고베생협의 성장을 단순히 고베 대지진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지진이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베는 훨씬 전부터 협동조합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소위 일본 협동조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가 젊었을 때부터 활동했던 지역이 바로 이곳 고베이다.


가가와 도요히코. 우리 사회는 일제의 식민지 경험 때문에 일본의 위인들에 대해서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세계적으로 슈바이처·간디와 함께 20세기 초 가장 헌신적인 사회운동가로 평가받은 인물이다.

기독교 목사였던 그는 고베의 빈민가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일본의 빈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평화운동 등에 깊숙이 관련하였는데, 그중 가장 열정을 쏟았던 분야가 바로 소비자 생협과 의료 생협을 조직했던 협동조합 운동이다. 1921년에 설립된 고베생협은 그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지역생협으로서 90년 넘는 전통을 가진 고베생협. 그러니 고베생협이 대지진 당시 재해구호사업에 발 벗고 나서고 고베시민들이 생협을 남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고베생협 매장 내부 없는 게 없다 ⓒ 이희동

  
우리는 이틀 뒤 고베생협 매장에 직접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새삼 그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베생협이 유럽의 '쿱'처럼 대형슈퍼마켓의 모습을 하고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하는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입구에서 조합원 모집과 원전반대 운동에 관련된 전단지를 적극적으로 나눠주던 한 조합원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또한 매장 안에서는 어떤 할머니가 고베생협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청소를 하고 계셨는데, 그 표정이 무척 편안해 보였다. 아마도 생협 조합원으로서 자기 일에 자긍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즈호 협동농원의 설립과 목적

이윽고 도착한 미즈호협동농원. 농원은 생각보다 작았다. 처음에는 이름에 '협동'이 붙어 있어서 사회주의 국가의 광활한 협동농장을 떠올렸지만, 여러 조각으로 나뉜 토지에 뭔가 적힌 푯말이 꽂혀 있는 걸로 봐서는 오히려 우리의 주말농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거기에다 비닐하우스도 몇 동 붙어있는 걸 보니 서울 강동구의 도시농업도 떠올랐다.

도대체 협동농원이 뭐지? 농원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해서 협동농원인가? 생산수단을 모두 공유해서 협동농원인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이 협동하여 농원을 운영한다고 협동농원인가?
 

미즈호협동농원 전경 우리의 주말농장을 떠올리게 한다 ⓒ 류양선




 

미즈호협동농원 소개 열심히 설명 중인 담당자 ⓒ 류양선

 



이와 같은 의문은 담당자의 설명으로 이내 풀렸다. 일명 '에코 팜(Eco Farm)'으로도 불리는 미즈호 협동농원은 앞서 언급한 고베생협이 주변 26개 농가와 함께 출자해서 만든 유한회사로서, 고베생활협동조합이 만든 농원이기에 '협동'이란 단어를 쓰는 듯했다.



고베생협이 굳이 26개 농가와 함께한 것은 일본 생협법상 생협이 직접 농원을 운영하는 것이 금지됐기 때문이었다. 1998년 설립 당시 농민들은 협동농원을 설립하자는 제시를 무시했었는데, 고베생협이 농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밭 개간은 물론이요 도로까지 놓는 등의 모습을 보이자 그 정성에 감복하여 26개 농가가 미즈호 협동농원 설립에 참여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농민들의 신뢰는 이후 미즈호 협동농원의 경영에도 영향을 끼쳤다. 농민들이 협동농원의 들쑥날쑥한 수익에도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고베생협에서 대부분의 자본 출자를 한 만큼 농민들이 소유한 주식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미즈호 협동농원 자체가 수익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모두 인지한 결과였다. 생협과 농민의 신뢰가 협동농원의 기본이다.


 

미즈호협동농원의 쓰레기수거차량 홍보의 목적으로도 사용된다 ⓒ 류양선




 

교육생들을 위한 장화 교육은 협동농원의 주요 사업이다 ⓒ 류양선

  
그렇다면 고베생협은 왜 돈이 안 되는 줄 알면서 굳이 농민들의 이름까지 빌려 가며 협동농원을 만들었을까? 단순히 자신들의 공급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일까?

이에 대한 담당자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사회공헌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협동농원 설립 당시 고베생협의 대표는 환경문제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미즈호 협동농원을 통해 '매장의 유기물 폐자원 수거 - 퇴비생산 - 채소재배 - 매장 출하'라는 자원순환형 농업모델을 지역에 제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 결과 협동농원이 내걸었던 설립 목적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쓰레기 문제에 대한 인식 개선

둘째,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퇴비 생산

셋째, 조합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생태교육

넷째, 미래의 농업 인재 육성

담당자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 협동농원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씨 뿌리기 체험학습이나, 전세농장, 요리강좌, 농업강좌 등 대부분이 홍보 및 교육으로서 그것들은 협동농원의 존재 이유이자 결국 고베생협이 지역에서 뿌리를 굳건하게 내릴 수 있는 토대이기도 했다.
 

미즈호협동농원의 비닐하우스 생각보다 친환경적이지 않다 ⓒ 홍찬욱

 
 

미즈호협동농원에서 일본연수단의 세 번째 코스 ⓒ 이희동

  
협동농원에 대한 짧은 소개가 끝나고 우리는 담당자를 따라서 농원을 둘러보았다. 협동농원은 크게 농장과 퇴비공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담당자는 특히 퇴비공장 앞에서 열정적으로 자원순환형 농업모델에 관해서 설명했다.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생협의 중요성과 자원 순환의 필요성, 그리고 담당자들의 열정을 느낀다고 했다.  

일본에 있고 우리에게 없는 것들

미즈호 협동농원을 다녀온 뒤 가진 연수단 회의는 분위기가 예전과 사뭇 달랐다. 그전에는 대부분의 반응이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던 반면, 미즈호 협동농원을 보고서는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도시농업과 생협이 조금 더 앞서 있다는 게 중론이었다.

대표적으로 무농약 관련 농법의 경우 우리가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했다. 우리의 소비자들은 친환경이나 유기농, 무농약 상품에 민감하여 도시농업도 이를 추구하기 위해 애쓰는 데 반해, 미즈호 협동농원 담당자는 무농약은 너무 큰 비용이 들고 일본에서는 그것을 찾는 사람도 매우 적어서 굳이 무농약을 고집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미즈호 협동농원에서 봤던 자원순환형 농업은 이미 한국의 생협들이 훨씬 더 활발하게 진행하는 중이다. 예컨대 한살림의 경우 아산 지역에서 1998년부터 이미 논농사와 밭농사, 축산이 결합하는 지역 생태순환농업을 하고 있다. 친환경 유기농업으로 생산된 볏짚 등 농업부산물과 아산지역 한살림의 두부가공 공장에서 나오는 비지 등을 사료로 활용해 한우를 키우고, 이 과정에서 나온 소똥을 다시 지역의 논밭 농사 퇴비로 활용하게 해 유기적인 지역순환 고리를 완성하고 있다.

일본과 비교하여 시스템이나 기술적으로 절대 뒤처지지 않는 한국의 도시농업과 생협. 그런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 다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도시농업은 여전히 사양산업이며, 생협들의 성장은 이렇게도 느린 것일까? 단지 역사와 전통의 문제일까?

결국 모든 의문은 우리 사회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로 수렴되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모든 가치의 척도는 '돈'이다. 경제적 자산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의 주머니가 곧 인격이 된다. 도시농업에 사람이 없고, 생협이 아직 사회적으로 미미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도시농업과 생협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부심이 넘친다 협동농원에 대한 자부심이 보인다 ⓒ 류양선

  
당시 내가 본 일본은 우리와 달랐다. 미즈호 협동농원 담당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정규직의 평균 연령이 '25.5세'라는 것이었다. 담당자는 그들이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돈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협동농원이 가진 가치와 비전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농업과 생협이 가진 생명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만큼,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종사한다는 뜻이었다.  

부러웠다. 분명 일본 사회는 우리보다 가치 지향적으로 보였다. 물신주의에 빠져 승자독식 논리가 횡행하고 1등을 향한 무한 경쟁이 유일한 생존법칙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와 달랐다. 일본 사회는 아직 돈보다 소중한 그 무엇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물론 우리 사회에도 가치 지향적인 사람들이 많고, 우리의 생협 역시 계속해서 성장 중이다. 하지만 일본만큼은 아니었다. 일본의 공동체 의식과 그 구성원에 대한 신뢰와 배려는 분단과 내전을 겪으면서 공동체가 파괴되어버린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한때 '반일'도 아닌 '극일'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던 적이 있었다. 이후 '친일'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섞이면서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일본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내면서 내가 떠올린 건 바로 그 '극일'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으며, 공동체를 복원해 낼 수 있을까? 내가 몸담은 사회적 경제와 마을 공동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고베의 야경 극일을 꿈꾸는 밤 ⓒ 이희동

#일본연수 #고베생협 #미즈호협동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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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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