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부근 불침번 서고 있다'는 시조시인

팔순 김정희 시조시인 시선집 <물 위에 뜬 판화> 펴내

등록 2016.01.31 19:43수정 2016.01.31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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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면 거기 있고/눈 감아도 보이는 것/어디에도 있는 길을/어디에도 없는 길을//길 위에/길 찾으라고/길을 밝혀 주느니"(시조 "등명(燈明)" 전문).

김정희 시조시인이 최근 낸 시선집 <물 위에 뜬 판화>(동학사 간)에 실린 '서시'다. 팔순을 넘은 김정희(1934~ ) 시인이 40년간 시조를 생산하며 냈던 10권의 시조집에 실린 주요 작품을 한데 묶었다.


김정희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시조로 읊었다. 4·19를 기억한 "무학산 진달래", 5·18광주민중항쟁을 다룬 "망월동 백일홍",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다룬 "어떤 해일(海溢)", 농민시위현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시조로 읊조린 "쌀, 쌀, 쌀" 등이다.

 김정희 시조시인이 시조선집 <물 위에 뜬 판화>를 펴냈다.
김정희 시조시인이 시조선집 <물 위에 뜬 판화>를 펴냈다. 동학사

"합포만 물들이고 비명에 간 갈매기/무학산 치마폭에 더운 눈물 닦아/피무늬 곱게 얼룩진 진달래꽃 피었다"("무학산 진달래" 첫수).

"무쇠를 녹이리라/무쇠를 녹이리라/망월동 무덤가를 달구는 저 불가마/장대비 백날을 쏟아도 불길은 끌 수 없고"("망월동 백일홍" 첫수).

"젖어미는 통곡한다 버려야 할 자식 두고/햇빛과 비바람에도 손 모은 피붙이를/길거리 팽개쳐놓고/돌아서는 농심은"("쌀, 쌀, 쌀" 첫수).

시인은 아름다운 마산 무학산 진달래를 보고 4·19의거의 기폭제가 된 마산 3·15의거를 떠올렸다. 경남 진주에 사는 시인이 광주 망월동에 가서 무덤을 보고 영혼들의 강렬했던 염원을 떠올렸다. 시인은 농민들이 쌀수입 개방에 맞서 벌이는 시위 현장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같이 '통곡'했다.


김연동 시조시인은 "망월동 백일홍"에 대해 "환청처럼 일어나는 그날의 비명소리를 생각하면 30년이 지난 지금도 비수로 가슴을 후비는 것 같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그해 오월이 또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며 "섬세한 비유와 비장미가 흐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가 시편을 지배하고 있다. 김정희 시인의 외유내강의 기질이 잘 들어난 작품"이라 평가했던 적이 있다.

"자욱한 안개에 갇혀 회오리 잠든 산하/흩어진 살점들이 백골을 추슬러도/떠돌며 서성이는 넋 불침번을 서고 있다""("휴전선 부근" 둘째수).


"그 날이 오면 아 그 날이 오면/백두의 정수리에서/한라의 발끝까지/뜨겁게 용솟음치는 기쁨 얼싸안고 춤추리"("그 날이 오면" 첫수).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소재로 한 시조다. 시인이 휴전선의 상황을 묘사하며 '불침번을 서고 있다'고 한 표현이 신선하다. 또 시인을 비롯한 민족이 얼마나 '그 날'인 '통일이 되는 날'을 염원하는지 시조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김정희 시인은 논개(論介, 1574~1593)와 남명 조식(曺植, 1501~1572)도 시조로 생산해냈다. 시조 "의암(義巖)의 말씀", "남명(南冥)의 하늘", "논개의 강" 등이다.

"진주교 지날 적마다 절로 가는 눈인사에게/빚진 목숨 사는 법을 채근하는 저 물음표/계사년 먹구름 뚫고/감탄사로 늘 오신다"("의암의 말씀" 네 번째 수).

"삼동에 베옷 입고 볕 보지 못한 날을/오지랖 성성자(惺惺子)로 뼈를 깎던 스승의 길/천둥에 흔들리지 않을 청대숲을 길렀다"(남명의 하늘" 세 번째 수).

기생 신분으로 변장해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빠졌던 논개. 그의 죽음은 400년이 지나도, 아니 4000년이 지나도 시인의 표현처럼 우리한테는 늘 '감탄사'다.

그리고 임금이 주는 관직도 거부하고, 그에게 '정치를 똑 바르게 펴라'는 상소(단성소)를 올렸던 남명 선생의 정신은 21세기를 사는 우리한테 푸른 대숲처럼 살아있다.

이밖에 김정희 시인이 생산해 시조문단에서 관심을 모았던 "박물관 고(考)"과 "세한도 속에는", "입춘 무렵", "빈 가게의 노래", "화엄(華嚴)의 나라"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시인은 차(茶)와 불교에도 심취해 많은 작품을 썼다.

 김정희 시조시인이 경남 진주시 새벼리 언덕에 '시경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시조문학관을 개관했다.
김정희 시조시인이 경남 진주시 새벼리 언덕에 '시경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시조문학관을 개관했다. 윤성효

박영학 원광대 명예교수는 작품해설을 통해 "혼탁한 죽음의 상처가 남긴 연민의 찌꺼기를 걸러낸 내면에는 맑은 혼이 고인다. 소심(김정희 시인의 호)의 시는 아주 잘 삭은 영혼의 말간 바람소리 같은 숨결을 영접한다"며 "이런 정신이 가벼움이 비롯이 되어 시적 자아는 싸고도는 죽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1975년 <시조문학>지에 작품 "화도"로 등단한 김정희 시인은 시조집 <소심> <산여울 물여울>  <빈잔에 고인 앙금> <풀꽃은유> <망월동 백일홍> <빗방울 변주> <그해 겨울, 얼음새꽃> 등 10권을 펴냈다.

그는 한국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경상남도문화상, 허난설헌문학상, 월하시조문학상 등을 받았고, 진주에 '시조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김정희 시조시인 #시조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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