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지옥실험의 기록 2008-2018 <대한민국 몰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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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실수에서 교훈을 얻어 문제를 바로잡고, 그로써 우리가 사는 곳을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제가 남 탓을 할 수 없는 까닭은, 제가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나라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안전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 182쪽 대통령이 한 말이라고? 무슨 헛소리냐고, 환청을 들었느냐 반문할지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이 연설의 주인공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2009년 발생한 '성탄절 테러 미수 사건'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한 여객기가 미국에 착륙하기 직전 테러 기도가 있었다. 다행히 테러범은 폭발물에 손대지 못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오바마 대통령 진노, 책임자 엄중 문책'이란 기사가 쏟아지고 잠잠해질 때쯤, 보수언론에 '테러 미수 사건을 덮고 이제 경제를 살릴 때'란 사설이 등장했으리라.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책임 전가보다 문제 해결이 더 중요하다"면서 미봉적 해결을 거부했다. 한화 1조 원 이상으로 전자 장비를 설치하는 등 구체적 해결책을 내놨다.
한국과 극명히 대비된다.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쏘며 각료를 향해 강한 어조로 질책하고 넘길 수 있는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더 큰 희생자를 불러온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해경 해체나 '살려야 한다'는 벽보 한 장이 미래지향적 대책이 될 수 없다. 반성인 듯 반성 아닌 반성 같은 '유체이탈화법' 또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한국의 신문은 '대통령 진노' 또는 '대통령 질책'이라는 표제어를 즐겨 싣는다. 그리고 기사에는 '관계 당국자들은 침통한 표정이었다'는 내용이 단골로 따라 나온다. 다른 나라의 언론 보도를 주의 깊게 살펴온 사람이라면 이런 보도 행태가 얼마나 특이하고 '한국적'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 185쪽대통령은 "책임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정작 "책임 있는 모든 사람" 속에 늘 자신은 들어가지 않았다. 사고 재발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나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두루뭉술한 단어들의 환상적인 '콜라보'다. 막연함 한 스푼, 모호함 반 스푼. 해석은 오롯이 국민의 몫이다.
책은 영국 <가디언>이 세월호 보도에서 박 대통령의 대처 방식을 문제 삼았다고 소개했다. 적어도 "서구 사회였다면 국가적 재앙에 그처럼 늑장 대응을 한 지도자가 무사하기 어려웠으리라"면서 "지지도는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 자리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잔인한 삶을 거부하든지 더 잔인해지든지"저자는 대통령이 "무제한의 권리와 권력을 누리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평했다. 권리가 있다면 의무도 있다. 초등학생도 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책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도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1순위로 꼽았다.
영화 <내부자들>에 나오듯 '회사의 방침'으로 움직이는 언론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국민이 아닌 권력을 떠받드는 게 더 '꿀'이란 사실을 말이다. 정부의 헛발질을 감싸기 급급한 빤한 보도에도, 구독자 수와 이들의 주요 광고수입원인 대기업 매출은 견고하다.
"언론은 '질문하지 않은' 대가로 정부로부터 종편 허가를 받고 광고를 확보하고 청와대 대변인과 국회의원 자리를 얻었다. 이렇게 정부와 한몸이 된 언론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대통령을 난처하게 만들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 277쪽"예컨대 박근혜 대통령 해외순방 보도를 보면 외교 담화에서 어떤 의제를 어떻게 다뤘는지 냉정히 보도하기보다 '어떤 옷을 어떻게 입었네', '외국어 발음이 어땠네', '박수가 몇 번 터졌네' 하는 이야기로 지면과 방송을 채운다. 정부 정책에 대해 객관적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여론이 제대로 형성될 수 없다." - 90쪽왜 이들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선거운동 기간엔 고개를 조아리지만 과연 투표일 이후에도 그럴까. 지속적인 동력을 쥐어야 한다. 저자는 "비록 완전한 목록은 아니더라도 몇 가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제대로 불매운동을 할 것, 스스로 노동자란 사실을 깨달을 것, 공권력과 언론의 횡포에 대항할 것, 가해자가 되지 말 것 등이다.
책은 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우리 사회의 꽤 넓은 부분을 다뤘다. 공감능력 상실과 만연한 경쟁주의, 강자에 기생해 약자를 조롱하는 세력,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양심을 내던진 이들, 탐욕에 눈멀어 사람의 생명마저 담보로 삼는 기업,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횡행하는 지옥실험의 현장 '대한민국'.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잔인한 삶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더 잔인해지든지. 이 선택은 우리의 삶과 공동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 47쪽인간으로서, 더는 잔인해지고 싶지 않다. 더 잔인해지는 대한민국을 보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 몰락사 - 지옥실험의 기록 2008-2018
강인규 지음,
오마이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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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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