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 관련 장병상의 광주 사택을 방문한 김구와 장병준의 가족들.
장병준기념사업회
'그 무렵 임시정부는 재무부령 1호(6월 15일)로 '인구세 시행령세칙', 정부령 3호(6월 16일)로 '임시징세령'을 공포한다. 임시정부 재원 조달에 비상이 걸리자 포양은 독립운동자금모집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해 장산도 대지주의 종손이자 5촌 조카인 장동식과 서태석(사회주의자)을 만난다. 장동식은 당시 자신의 혼례를 앞두고 장병준에게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액의 돈을 맡겼는데, 이는 장동식에 비밀요원인 당숙에게 내놓은 독립운동자금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체포된 장병준은 일제 경찰신문(종로경찰서, 장병준 신문조서,1920. 6. 16)에서 그 돈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장산면의 장동식으로부터 집을 산다고 하여 보내온 돈 5,500원이 있는데, 그 돈은 한성은행에 저금하여 두었다."'(<평전>, 116쪽)임시정부 비밀요원 장병준은 또한 이 시기에 목포, 무안, 완도, 강진, 해남 등 서남해안의 운동가들과 교류했다. 이들의 일부는 사회주의자로 이후 3.1운동 1주년 기념투쟁과 신간회 결성, 그리고 소작료 인하 투쟁까지 이어지는 목포지역 일대의 항일민족운동 핵심이 되었다. 포양은 동갑내기 보성전문 출신 박기영, 이동욱과 함께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거사를 계획한다. 3.1운동 1주념을 기념해 학생들에게 동맹휴교를 선동하고 상인들에게 철시를 선동하는 경고문을 전국에 배포하는 담대한 거사였다.
3.1운동 1주년 기념경고문 배포 사건으로 1920년 3월에 체포된 포양은 경성본정(중부)경찰서 신문에서도 '박현숙'이라는 가상 인물을 만들어 놓고 그가 3.1운동 1주년 경고문을 건네주고 배포를 지시한 주모자라고 진술해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당시 목포지청이 경성지방법원에 보낸 조회서에는 "장병준은 상하이 대만민국임시정부가 조선내 독립운동을 유발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한 요원이라는 풍설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한 사항이 있으면 특별히 회답해 달라"(목포지청 검사분국, '망동사건에관한 조회', 1920. 3. 18)고 돼 있다.
이를 보면 일제는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을 뿐 상당한 의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20여 명이 체포되어 9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동욱은 징역4년, 장병준은 징역3년 그리고 서태석 등 7인은 징역1년을 선고 받았다.
포양은 1922년 6월에 가출옥해 서울에서 병마와 싸우며 몸을 추스렸다. 한동안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1923년 봄 3년의 형기가 만료되자 목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출옥해 암태도 소작투쟁을 벌인 서태석과 함께 목포에 근거지를 두고 서남해안 섬들을 오가면서 지역운동을 조직하고 통합하는 활동을 벌인다.
1년의 투쟁 끝에 성취한 암태도의 승리는 인근 섬 농민들에게 영향을 미쳐 도초도(1925년), 자은도(1926년), 지도(1927년) 소작쟁의를 거쳐 장산도에 인접한 하의도 농민투쟁(1927년)으로 확산된다. 그해 목포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고 조사부 총무간사를 맡은 포양은 일제 지주와 농민들 사이에 벌어진 하의도 농민투쟁에 신간회 간사 자격으로 적극 관여했다.
장병준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5촌조카인 장동식은 모두 항일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3.1운동 1주년경고문 배포 사건 당시 스무살이었던 장병상은 형 대신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형이 맡겨둔 수만 원이 든 한성은행 통장과 민족계은행 해동은행 주금(株金) 모집 광고물에 대해 집중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했다.
뒤늦게 광주고보에 다닌 장홍재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해 구속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막내 장홍염은 휘문고보 시절에 광주학생운동이 나자 동맹휴교를 주도해 퇴학당했다. 이듬해 여학생들이 중심이 된 2차 서울 학생시위를 이끈 뒤 중국으로 건너가 아나키스트 활동을 벌였다. 장산도 장씨 가문의 종손으로 장산면장을 지낸 장동식은 당숙(장병준)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독립자금 후원하며 농지는 소작농에 나눠주고 사재 털어 학교 설립

▲ 민주당 전남도당대회 기념 조병옥 박사(앞줄 가운데)와 장병준(앞줄 맨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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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학생 시위 주도 혐의로 수배된 장홍염은 1930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교관학교에서 사격술을 익힌 뒤에 정래동, 오남기 등이 이끄는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는 육혈포로 무장하고 중국과 만주 일대의 일제 관원이나 밀정을 처단해 일제 관원들에게는 '북경의 쌍권총'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1932년 가을 베이징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경찰서에서조사를 받았다. 그 또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형처럼 중국내 활동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아 무장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다만, 서울 학생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덕분에 형제가 나란히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장병준은 일제강점기 후반기에 창씨개명은 물론,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관련된 것을 모두 거부하고, 조카-동생들과 함께 학교(장산공립보통학교, 해방후에는 장산중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고 7남매를 둔 집안을 건사하는 데 전념했다. 그것은 일제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지위를 포기함으로써 가능했다. 그가 장산도에 들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 설립(1932년 장산공립보통학교)이었다.
해방 후에도 포양은 네 살 아래 장조카 장동식과 17살 아래 장홍염과 뜻을 모아 중학교를 설립한다. 장동식이 30만평의 땅을 기부하고 장홍염은 물려받은 토지의 매각대금을 내놓아 미 군정청 문교1호가 된 장산중학교(1982년 공립으로 전환)를 설립한 것이다. 이처럼 인동 장씨 형제들이 독립운동을 후원하면서 물려받은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고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은 우당 이회영 집안의 6형제와 비슷하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포양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민선)이 되었다. 1946년 한민당 광주지부장, 전남도당 위원장 등을 맡는 등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미 운동 일선에 나설 연배는 아니었으며, 둘째 장병상과 막내 장홍염이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당시 광주역장이던 장병상은 한민당 전남도당 감찰위원장, 독립촉성중앙협의회광주지부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장홍염은 1948년 5월 제헌국회 소집을 위한 남한 단독총선에 한민당 소속으로 무안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의원칙을 공약으로 내세운 그는 실제로 해방 직후 상속받은 토지의 일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넘겨준 바 있다.
'제헌의원 장홍염은 소작농과 빈농에 유리한 토지개혁 법안을 관철시켰다. 또한지금 봐도 혁신적인 노동자의 이익 균점권과 노동자에게 기업운영의 30% 권리를 부여하는 안건 등을 발의했다. 그리고 정부가 발의한 '국보 해외 반출안' 법안을 부결시켰다. 특히 장홍염은 '하의도 토지 해결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해 300년에 걸쳐 소유권 분쟁을 일으킨 하의도 토지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 <평전> 235쪽한편,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해 박흥식, 최린, 이광수 등 반민족행위자들을 체포하자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방해공작이 시작되었다. 오제도 검사를 앞세워 김약수 국회 부의장 등 의원 13명을 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의로 검거한 '국회프락치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초 오제도가 검거 대상으로 삼은 국회의원 72명 가운데는 장홍염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북경의 쌍권총' 장홍염은 오제도를 요릿집으로 유인한 뒤 권총을 꺼내 들고 "나는남로당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를 수사 대상에서 제외하라"고 위협해 각서를 쓰게 해 검거 대상에서 빠졌다고 한다.' - <평전> 236쪽.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투쟁 병행한 보기 드문 집안

▲ 1960년 3월 15일 낮 12시 45분 '곡 민주주의 장송' 현수막을 들고 광주 금남로에서 전국 최초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선 장병준과 민주당 당원들.
장병준기념사업회
장홍염은 제헌의회 구성 때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소위 '멘더터리 운동'을 벌여 한국 주권을 미국에 바치려다 쫓겨난 이승만이 또다시 독재로 나라를 망치려 한다"며 이승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장홍염은 2대 총선에서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이승만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다가 1952년 전시의 5.26 부산 정치파동 때 헌병대에 구속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벗이었던 신익희의 급서(1956년)와 동생 장병상의 사망(1957년)으로 실의에 빠진 장병준은 이승만 독재가 기승을 부리자 정치활동에 다시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제4대 정-부통령선거는 헌정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점철되었다. 이미 투표시간 전에 4할의 사전투표가 횡행했고, 완장부대와 경찰이 투표장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상황에서 3인조 공개 투표를 했다. 1959년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에 선임된 장병준은 1960년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노구를 이끌고 전면에 나섰다. 이미 투표일 전부터 부정선거 움직임을 목도했기에 민주당 전남도당은 선거일 전날 밤에민주주의 장송 시위에 사용할 '哭 民主主義 葬送'이라고 쓴 현수막과 두건 등을 준비한 터였다.
장병준은 3월 15일 아침일찍 투표 참관인으로 나섰다가 악랄한 부정선거가 자행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장병준은 이날 낮 12시45분 어깨에 장장(葬章)을 두르고 머리에 백건을 쓴 민주당 참관인 70여 명을 포함한 당원 200여 명을 이끌고 광주 금남로를 점령하고 시위를 벌였다.
전국 최초의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였다. 서중석 명예교수(성균관대 사학과)에 따르면, 광주 3.15의거는 4.19혁명의 뇌관으로 작동한 3.15마산의거보다 세 시간 가량 빨랐다. 장병준이 후손에게 남긴 이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의 참모습'은 <평전>의 표지 사진이 되었다.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투쟁을 병행한 보기 드문 집안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르면, 장병준은 일제강점기에 벌인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을 스스로는 단 한 줄도 남긴 바가 없었다. 그 흔한 자서전은 물론이고 일기 한쪽, 편지 한 장도 전해오는 자료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눈에 띄는 것은 7남매와 찍은 흑백 가족사진이다.
필자는 이 사진을 보면서 우리 선배님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이렇게 부지런히 '자식농사'를 지으셨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선생은 자신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지만, 선생에 대한 기억을 전승한 넉넉한 후손들이 있었기에 삼한갑족(三韓甲族)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땅끝 작은 섬마을에서 이뤄진 독립운동 역사의 복원이 가능했으리라.
장병준 평전 - 통합과 인애의 정신 실천한 민족운동가
박남일 지음,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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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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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품은 독립운동가와 '북경의 쌍권총' 형제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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