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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혁명적 음악가가 된 이유

1781년 6월 8일, 최초의 자유음악가 탄생하다

16.06.12 12:00최종업데이트16.06.1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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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 중 특히 인상적인 장면. 떠돌이 채플린이 길을 걷는데, 트럭 짐칸에서 붉은 깃발이 떨어진다. 채플린은 깃발을 주워서 트럭을 따라가며 흔들어 댄다. 물론 운전기사에게 깃발을 돌려주려는 것. 이때 파업 노동자들의 행렬이 채플린을 따라온다. 채플린은 가두시위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경찰에게 붙들려 간다.



자유 없이 살 수 없었던 모차르트, 그의 삶은 영락없이 <모던 타임즈>의 채플린을 닮았다. 그는 정치가도 혁명가도 아니었지만, 예술의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에 기존 체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음악가는 귀족과 성직자의 하인이었다. 잘츠부르크 통치자인 콜로레도 대주교는 하인 모차르트의 여행을 제한했다. 대주교를 수행할 때 모차르트는 요리사 옆자리에서 식사해야 했다. 그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불탔지만 잘츠부르크에는 오페라 극장이 없었다. 이래저래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야만 했다.

1781년 5월 9일, 뮌헨에서 <이도메네오>를 초연하느라 예정보다 오래 자리를 비운 모차르트를 향해 콜로레도 대주교는 "막돼먹은 놈, 불한당, 개차반"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모차르트는 사직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하인이 맘대로 사직하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한 달 뒤인 6월 8일, 콜로레도 대주교의 부관인 아르코 백작은 글자 그대로 '엉덩이를 걷어차서' 모차르트를 쫓아냈다. 음악사상 최초의 '자유음악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구호는 "자유 아니면 죽음"이었다. 자유 음악가가 먹고 살 만한 조건인, 돈 있는 시민계급의 출현, 악보 출판업의 발달, 피아노의 보급 등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는데도 모차르트가 자유 음악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자유 아니면 죽음"이란 혁명의 구호를 몸소 실천한 것과 다름없었다.

막막한 세상에서 그는 오로지 자기 재능으로 성공을 거머쥐어야 했다. 모차르트에게 피아노는 가장 효과적인 악기이자 강력한 무기였다. 그는 예약음악회(Akademie)를 열어 귀족과 시민 등 고객들 앞에서 새 피아노 협주곡들을 직접 연주했다. 그는 어떤 음악에 사람들이 환호할지 예측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 피아노 협주곡들이 "길거리의 마부들도 휘파람으로 부를 수 있는 곡"이며, "오케스트라 부분은 현악 사중주가 맡아도 된다"고 했다. 신흥 시민계급의 가정에 피아노가 보급되고 있었으니, 누구든 친지와 함께 집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들이 "전문가들의 취향도 만족시킬 수 있는 곡"이라고 덧붙였다. 흥행을 위해 예술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고 자신한 것이다. 자유음악가 모차르트는 이렇게 '고급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가 빈에서 활동한 10년(1781~1791)은 음악사에서 '고급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시대였다.

모차르트의 최고 걸작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돈조반니>가 그의 경제적 몰락을 자초한 것은 역설이다. 알마비바 백작의 위선과 탐욕을 신랄하게 풍자한 <피가로의 결혼>은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들은 백작이 하인과 여성들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장면에 "혐오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피가로의 결혼>은 빈에서 9번 공연하고 막을 내려야 했다. 많은 시민들이 이 작품에 열광했지만, 음악 취향의 큰 줄기는 여전히 귀족 계급의 손으로 결정되던 시절이었다.

변두리인 프라하에서 <피가로의 결혼>은 대성공이었다. 프라하 사람들은 이듬해 공연된 <돈조반니>에도 열광했다. 그러나 빈은 분위기가 사뭇 달았다. 1788년 빈에서 공연된 <돈조반니>는 흥행 참패였다. 이 오페라의 1막 끝에서 선남선녀들은 돈조반니의 선창에 따라 "자유 만만세(Viva la liberta)"를 외친다. 2막 끝에서 돈조반니는 참회를 거부한 채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 죽는다. 정치적으로 <피가로의 결혼>보다 더 불온한 오페라로 여겨질 만했다. 이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경제적 고충에 직면하게 된다. 그를 아끼던 요젭 2세가 궁정 작곡가 자리를 주었지만 귀족들의 무도회에 쓰일 춤곡을 작곡할 수 있을 뿐이었다. 1790년 초, 요젭 2세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사망하자 모차르트는 빈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돈조반니>1막 끝부분, 모든 출연자들이 ‘자유 만만세’를 외치는 장면은 자연스레 혁명의 풍경이 된다.


<돈조반니>1막 끝부분, 모든 출연자들이 '자유 만만세'를 외치는 장면은 자연스레 혁명의 풍경이 된다.



모차르트가 음악으로 혁명을 앞당기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자기 양심에 따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노래했을 뿐인데, 당시 상황에서 자연스레 혁명에 앞장선 모양새가 됐을 뿐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폭발한다. <피가로의 결혼> 이후 3년, <돈조반니> 이후 2년이었다. 모차르트가 죽은 해인 1791년, 혁명의 확산을 두려워 한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오스트리아는 급속히 반동화되고 있었다. 비밀경찰이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모차르트가 몸담고 있던 프리메이슨은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그해 9월 30일 초연된 <마술피리>는 "빛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에게 승리했다"고 선언한다. 이 또한 대놓고 프랑스 혁명을 예찬한 것으로 해석됐다.

"모차르트 음악이 혁명적"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많겠지만, 근대의 여명인 18세기 말, 온 힘을 다해 진지한 음악가의 길을 갔기 때문에 그는 혁명적 음악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리바리하게 붉은 깃발을 흔드는 떠돌이 채플린의 모습에 자유음악가 모차르트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채훈님은 MBC 해직PD입니다.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습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공저) 등이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모차르트 채플린 모던타임즈 돈조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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