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까지 싸우다 절명시 남기고 순국한 이대원 장군

이대원장군의 항로 탐사대 따라나선 손죽도 여행

등록 2016.08.03 13:31수정 2016.08.03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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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손죽항 입구에 세워진 이대원 장군 동상으로 이대원장군 호국정신선양회장 이민식씨가 사비 8천만원을 들여 건립했다(2015.5)

손죽항 입구에 세워진 이대원 장군 동상으로 이대원장군 호국정신선양회장 이민식씨가 사비 8천만원을 들여 건립했다(2015.5) ⓒ 오문수


지난 토요일(7월 30일) 오전 10시, 여수 소호동에 정박한 국내 유일 범선 코리아나호에 승선한 '이대원장군 항로탐사팀'이 손죽도를 향해 출발했다.

이대원장군 호국정신선양회가 주최하고 전남요트협회, 손죽도 어촌계가 주관한 탐사팀에는 21명의 외국인과 여수일원에 거주하는 회원 20여명이 참가했다. 소호항을 떠난 코리아나호가 백야도 등대를 지날 무렵 정채호 선장이 승선자들을 소개하고 난 후 이민식씨가 마이크를 들고 이대원 장군에 얽힌 역사강의를 시작했다.


a  이대원 장군 호국정신선양회장 이민식씨가 보호수인 느티나무(수령 200년, 수고 16m, 둘레 240cm) 아래에서 동네주민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원 장군 호국정신선양회장 이민식씨가 보호수인 느티나무(수령 200년, 수고 16m, 둘레 240cm) 아래에서 동네주민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 오문수


고향인 손죽도 발전을 위해 애쓰고 이대원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비 8천만 원을 들여 이대원장군 동상을 제막(2015.5)한 이민식씨는 수중건설업체인 해양산업 대표이다.

22살 나이에 1, 2차 손죽도해전 치르고 전사한 이대원 장군

사람들에게 조선시대 수군장수를 말하라하면 이순신 장군만 떠올린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에 100여 명의 수군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이대원 장군을 아는 이는 드물다.

a  일행을 태우고 간 국내 유일 범선 코리아나호가 손죽항에 정박하고 있다

일행을 태우고 간 국내 유일 범선 코리아나호가 손죽항에 정박하고 있다 ⓒ 오문수


1566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이대원은 18세에 무과에 응시해 선전관으로 등과(登科)하고 3년 후인 21세에 전라도 고흥의 녹도만호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년) 2월에 왜구가 수시로 나타나 양민을 괴롭히자 2월 10일 손죽도 인근 해상에 출몰한 왜구 20여 척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일주일 뒤인 2월 17일, 또다시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으로 쳐들어오자 100여 명을 이끌고 3일 밤낮으로 싸웠다. 중과부적으로 대세를 각오한 이장군은 속적삼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절명시를 써 종에게 부탁하여 고향 본가로 보냈다. 이대원 장군이 쓴  절명시 내용이다.


a  왼쪽에 보이는 섬이 소거문도이고 사람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른쪽섬이 손죽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전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들과 1,2차 해전을 치르고 장렬히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영혼이 누워있는 것일까?

왼쪽에 보이는 섬이 소거문도이고 사람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른쪽섬이 손죽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전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들과 1,2차 해전을 치르고 장렬히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영혼이 누워있는 것일까? ⓒ 오문수


"해 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
외로운 군사 힘 다해 끝나는 일생 슬프다
나라와 어버이께 은혜 못 갚아
원한이 구름에 얼켜 풀릴 길 없네"


이 시를 부하에게 전한 후 최후까지 싸우다가 포로가 된 장군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적을 나무라다 참혹하게 칼에 찔려 절명했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아 장군의 절명시를 가족에게 전한 이는 손대남이라고 전해진다.


손죽도에는 시누대가 많다. 손죽항 입구에 세워진 마을 유래비에는 이대원 장군의 죽음으로 대원을 잃었다는 뜻으로 손대도(損大島)라 해서 손죽도(巽竹島)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중종 55년에 손죽도에 왜구가 침입해 물리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걸로 보아서 그 이전부터 손죽도로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손죽도 주민들... 이대원 장군 모신 충렬사에서 429년 동안 제사지내

a  이대원 장군을 모신 손죽도 충렬사 모습. 동네 주민들이 음력 3월 3일에 장군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이 전통은 429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대원 장군을 모신 손죽도 충렬사 모습. 동네 주민들이 음력 3월 3일에 장군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이 전통은 429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 오문수


a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감실로 요즘 보기드문 자료이다. 충효의 고장답게 이대원 장군을 모시는 손죽도 충열사 바로 이웃한 박양수씨 집에서 촬영했다. 박양수씨는 여행에 지친 일행을 무료로 재워줬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감실로 요즘 보기드문 자료이다. 충효의 고장답게 이대원 장군을 모시는 손죽도 충열사 바로 이웃한 박양수씨 집에서 촬영했다. 박양수씨는 여행에 지친 일행을 무료로 재워줬다. ⓒ 오문수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1164번지에는 이대원 장군을 모신 충렬사가 있다. 인조 15년(1637년)에 세워졌다고 하며, 그 이전인 선조 23년(1590년) 또는 선조 30년(1597년)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차 손죽도해전 대승 후 2차 해전이 일어나자 이대원 장군은 전라좌수영에 지원을 요청하고 손죽도 해역에 출동해 왜군과 맞서 싸웠으나 대승을 시기한 전라좌수사 심암이 지원하지 않아 절명시를 남기고 끝내 전사했다.

장군이 전사하자 마을 주민들은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남쪽 뚝박골에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동민들은 초가로 얽어 사당을 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나 퇴락과 수리를 거듭해오다 1983년 마을 주민의 정성으로 현재 사당 건물을 중창했다. 손죽도 주민들은 음력 3월 3일에 제사를 지내며 이 전통은 429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손죽도 마을 앞 대지 60평, 건평 5평의 목조 기와집인 충열사는 솟을 대문 형식의 쌍여닫이 출입문이 있고 고목이 우거져 있는 경내를 기와 담장으로 둘러 정돈이 잘 되어있다.

a  여수 영당모습.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최영장군을 모시다가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 장군을 주신으로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배향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제 관헌에 의해 철거됐다가 복원해 이순신, 최영, 이대원, 정운의 네 장군과 용왕신, 산신 6위의 영정을 봉안했다.

여수 영당모습.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최영장군을 모시다가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 장군을 주신으로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배향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제 관헌에 의해 철거됐다가 복원해 이순신, 최영, 이대원, 정운의 네 장군과 용왕신, 산신 6위의 영정을 봉안했다. ⓒ 오문수


여수시 남산동 어항센터에는 영당이 있다. 여수지방의 해신당(海神堂)으로 어민들의 수호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최영장군을 배향하여 왔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충무공 이순신을 주벽으로 이대원장군, 정운장군 등 3위를 추배하여 모셨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관헌에 의해 헐린 영당은 복원해 이순신, 최영, 이대원, 정운의 네 장군과 용왕신, 산신의 6위를 봉안하고 있다.

정운장군은 이대원장군 후임으로 녹도만호에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옥포, 당포, 한산도 등지에서 선봉장으로 나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부산 몰운대에서 순국한 장군이다.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이대원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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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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