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눈 감은 엄마, 그는 덕혜였다

폐암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싶어 했던 영화 <덕혜옹주>

등록 2016.08.20 20:00수정 2016.08.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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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덕혜옹주>를 혼자 보았다.
영화 <덕혜옹주>를 혼자 보았다. pixabay

영화 <덕혜옹주>를 혼자 보았다.

"영화 언제랴?"


지난 4월이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기억들이 얽혀서인지 고통에 정신을 놓아버려서인지, 밤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던 터였다.

"무슨 영화?"

새벽, 혈액검사 때 터트린 혈관의 잔해로 푸르스름 부어오른 팔뚝을 젖은 물수건으로 조심히 닦으며 의무적으로 물었다.

"영~~화~~"

미간을 찡그리며 살짝 뜬 눈꺼풀 속의 눈동자는 흐렸다. 아프면 눈동자 색도 흐려지는구나 싶었다.


"우리 엄마가 무슨 영화를 말하는 걸까? 딸내미는 잘 모르겠네..."

다시 따뜻하게 적셔온 수건으로 이번엔 얼굴을 닦았다.


"치워라."

금방 알아먹지 못하는 딸이 답답했던지 살갗을 문지르는 수건의 감촉이 거칠었던지 돌리는 엄마 얼굴이 퉁명스러웠다.

버겁던 우리, 여름을 기약하지 못했다

 고통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고통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pixabay

처절한 투병과 간병을 주고받기 버거운 밤을 새우고 무사히 맞이하는 아침엔 경건함과 불편함이 함께했다. 새로운 날을 맞이했다는 안도감과 몽롱함을 핑계 삼아 함부로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한 반성이 따른다.

고통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얼마나 아프면 저러실까 싶다가도 부족한 손길을 탓하는 말이 가슴을 찌르면 불편해진 마음이 금방 얼굴에, 말투에, 행동에 나타났다. 그것을 반성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 의식과도 같은 행동이 엄마의 아침 세면이다.

따뜻한 수건으로 주삿바늘에 방사선 치료에 피폐해진 몸을 닦다 보면 절로 숙연해진 마음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날 아침은 간밤의 연장과도 같아서,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얼굴과 최대한 먼 다리를 주무르며 시간을 보냈다. 무슨 영화인지 궁금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불편한 감정만 남았다. 아침부터 그런 날이면 금방 지쳤다.

"덜렁대기나 하고..."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엄마가 하는 말에만 집중하다 보니 감정은 점점 차고 올라왔다. 아예 자리를 피해버리려 일어서는데 기억 하나가 갑자기 쑥 떠올랐다.

"덕혜옹주 말하는 거야?"

엄만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자리에 앉아 휴대폰으로 금방 검색했다. 잠깐 생각했어야 했다. 그날 아침 그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말에 집중하기보다 엄마의 상황에 집중했더라면... 늘 그렇듯 후회스러운 행동은 빨리 온다.

"아직 멀었네 여름에 개봉한다는데..."
"..."

엄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라도 붙잡고 싶은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늘 해오던 말씀마따나 '복이 없는 팔자'에 적합한 이유가 되었다. 그 뒤로 엄마는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덕혜의 곁으로 간 엄마

 엄마에게 덕혜옹주는 노년에 찾아온 기쁨 중 하나였다.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고단한 자신의 삶과 맞물려 감정 이입이 많이 되었나 보았다.
엄마에게 덕혜옹주는 노년에 찾아온 기쁨 중 하나였다.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고단한 자신의 삶과 맞물려 감정 이입이 많이 되었나 보았다. 호필름

엄마에게 덕혜옹주는 노년에 찾아온 기쁨 중 하나였다.

6.25를 시골에서 보내고 이렇다 할 공부도 제대로 못한 채 종갓집 며느리, 철없는 남편 뒷바라지, 1남 4녀 자식들 치다꺼리를 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자식들 다 출가시킨 60대 이후에 엄마는 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마다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해서 기쁘다고 했다.

책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몇 년 전 쯤 생일 그 당시 베스트 셀러였던 <덕혜옹주>를 선물했다.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고단한 자신의 삶과 맞물려 감정 이입이 많이 되었나 보았다. 그 뒤로도 틈틈이 읽고 또 읽고 열 번도 넘게 읽었다며 재미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작년 봄인가 신문에서 <덕혜옹주>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기사를 보았다. 영화가 개봉하면 꼭 같이 가서 보자고 약속했다. 그랬는데 작년 연말 엄만 폐암 진단을 받고 급격히 악화되어 지난 5월 세상을 떠났다.

그날 아침 그때 했던 약속이 생각나신 거였다. 내가 조금만 더 생각이 깊었다면 조금 있으면 한다든지, 며칠 후라든지 엄마가 잡을 희망을 말로 전했어야 했는데. 봄에 여름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을지, 대답 없던 엄마의 그 마음이 아프다.

49제도 다 끝나고 기사에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의 이야기들이 올라왔다. 같이 볼 엄마가 없는 것이 영화가 늦게 개봉한 탓인 양 미운 마음도 들었다. 엄마를 보내는 의식처럼 영화를 봐야 한다는 책임감에 매일매일 상영관을 헤아리면서도 미루었다.

새로운 영화 개봉으로 상영관이 확 줄어버린 최근에야 영화관에 갔다.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났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건 없건, 덕혜는 곧 엄마였다. 삶의 마지막을 보내며 떠오른 영화, 살짝 가져보았을 희망 앞에 복 없는 팔자는 몇 개월의 시간이 얼마나 야속했을까.

무심코 손을 뻗었다. 엄마 손을 잡고 영화관을 나오던 버릇이다. 텅 비어 돌아보니, 쓰레기통에 음료 컵을 버리고 젊은 한 쌍이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어둠 속에서 "재미있다"며 곧 걸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덕혜옹주가 놓은 정신만큼 아팠던 엄마는 그렇게 그 곁으로 갔다.

 덕혜옹주가 놓은 정신만큼 아팠던 엄마는 그렇게 그 곁으로 갔다.
덕혜옹주가 놓은 정신만큼 아팠던 엄마는 그렇게 그 곁으로 갔다. pixabay

#엄마 #영화 #덕혜옹주 #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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