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이순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충무공 옛집을 둘러보고, <난중일기> 1592년 1월 1일자를 꼼꼼하게 읽어보다

등록 2016.12.31 16:22수정 2018.12.3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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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옛집 앞에는 '이 집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사시던 집으로, 종손이 대대로 살았으며, 일부는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집 뒤편에는 충무공의 위패(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가묘(집 안에 있는 사당)가 있어 매년 기일(돌아가신 날: 음력 11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라는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의 내용으로 볼 때, 충무공 옛집은 보물 등으로 지정된 문화재는 아니다. 하지만 집의 주인공이 이순신이다. 현충사에 온 이들 중 이 집을 둘러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도 마실 수 있는 충무공 옛집의 우물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충무정(忠武井)부터 둘러본다. 안내판에는 '이 충무정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가족들이 쓰시던 우물로서, 현재는 참배객의 식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경주 김유신 집터에 남아 있는 우물 재매정과 달리 충무정은 지금도 마실 수 있구나!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현충사 탐방객이 충무정 물을 보고도 아니 마시고 지나갈 수는 없다. 충무공과 그 가족들이 쓰시던 우물이니, 나도 한 바가지 마시고 나면 그 가족의 일원이 되는 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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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충무공 옛집 앞에 있는 우물 충무정. 이순신 장군과 그 가족들이 썼던 우물인데 지금은 답사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 정만진

집을 둘러보노라니 저절로 <난중일기> 1592년 1월 1일자 내용이 떠오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해인 1592년 새해 첫날, 즉 설날인 1월 1일에 이순신은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있으면서 이 집에 계시는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날 일기는 <난중일기> 맨 앞을 장식하고 있어서 특히 독자들에게 인상이 깊다. 그런 까닭에, 현충사 옛집에 와서 이순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 조카 봉(菶), 아들(豚) 회(薈)가 왔다. 다만(只) 어머니(天只)와 멀리 남쪽에 떨어져서 두 해 연속(再) 설을 지나치니(過) 너무도 애잔하다. 병사(兵使)가 군관(軍官) 이경신을 시켜 편지, 설 선물(歲物),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을 보내왔다.'

이순신의 1592년 1월 1일 일기이다. <난중일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의 1월 1일부터 시작되니, 위의 인용문은 <난중일기> 중에서도 첫날 기록이다. 새해 첫날을 맞으면서 <난중일기>의 속뜻을 꼼꼼하게 읽어본다. 당시에는 양력이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이순신의 음력 1월 1일과 현대인의 양력 1월 1일은 사실상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양력(陽曆), 음력陰曆)



양력은 태양을 기준으로 만든 태양력이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2422일이다. 따라서 1년을 365일로 하면 4년 뒤 0.9688일이 남게(閏) 된다. 현재 사용되는 달력이 4년마다 한번씩(4로 나눠지는 연도마다) 2월을 28일 아닌, 하루 더 많은(閏) 29일짜리 윤(閏)달로 배치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도 4년마다 0.0312일의 차이가 발생한다. 1582년에 만든 새 태양력(그레고리력)은 100으로는 나눠지지만 400으로는 나눠지지 않은 연도에 윤달을 두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예를 들면 1000년, 1100년, 1200년, 1300년 중에서 1200년만 윤달을 두고 나머지 세 해는 윤달을 두지 않는 방식이다.)




즉, 현재 사용하고 있는 태양력은 400년 동안 윤달이 있는 해를 100회가 아니라 97회만 둔다. 이렇게 하면 3,300년에 1일의 차이가 발생하므로 거의 문제가 없다. 




음력은 달이 차고 기우는 현상을 기준으로 만든 태음력이다. 음력은 본래 달이 태양 쪽에 일직선으로 놓여 있어 보이지 않는 삭(朔)을 초하루, 그로부터 15일이 지나 달이 태양과 반대편으로 일직선상에 있어 가장 환한 망(望)을 보름, 보름달이 다시 삭의 위치로 돌아가기 전날을 그믐으로 하여 한 달이라는 기간을 정한다. 이렇게 삭에서 다음 삭까지를 한 달로 하면 약 29.5일이 되기 때문에 음력 1년은 태양력의 1년보다 10일 정도 짧아진다.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음력은 2~3년마다 윤달을 두어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바뀌는 계절의 변화, 즉 회귀년(回歸年)을 력에 반영했다. 따라서 동양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음력은 순전히 달의 움직임만 살펴 만든 순태음력(純太陰曆)이 아니다. 기원전 600년 이후 음력에는 이미 태양의 움직임이 반영되었다. 그 때부터 음력은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이었다.




음력을 쓰면서도 태양의 움직임을 실생활에 반영한 대표적인 예는 24절기(節氣)이다. 서양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의 7일로 이루어진 주(週)를 기준으로 생활했지만 동양은 5일을 1후(候), 3후인 15일을 1기(氣)로 하여 생활했다. (기후라는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그렇게 기를 단위로 하여 1년을 나누면 24마디(節)가 생겨난다. 그것이 24절기(節氣)이다.




24절기가 태양을 기준으로 한 것은 당시가 농경사회였기 때문이다. 농사는 일조량, 강수량, 기온 등에 의해 풍작과 흉작이 좌우되는데, 그러한 기후 현상은 대체로 태양에 의해 결정된다. 24절기는 계절별로 여섯씩(4계절☓6절기). 달별로 둘씩(12개월☓2절기) 배치되었다.




24절기 외에도 우리나라에서는 한식(寒食), 단오, 삼복(三伏), 추석 등을 절기로 사용해 왔다. 찬(寒)밥(食)을 먹으면서 조상의 무덤을 가다듬은 한식은 양력 4월 5∼6일, 여자는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고 남자는 씨름을 한 단오는 음력 5월 5일, 삼계탕이나 개고기 등을 먹으며 더위를 이겨낸 초복은 양력 7월 20경, 중복은 양력 7월 30일경, 말복은 양력 8월 9일경이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이었다.




음력은 달의 모양이 날짜에 일치한다. 해를 보고는 날짜를 알 수 없지만 달을 보고는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달의 모양을 보면 밀물과 썰물 현상을 잘 예측할 수 있다. 음력은 그런 장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바닷가와 농촌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본래 세계는 모두 음력을 썼으나 이제는 모두 양력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도 음력을 쓰다가 1896년 이후 양력으로 전환했다.



 
설날에, 아우와 아들 등이 이순신에게 왔다? 

새벽에 아우, 조카, 장남이 왔다. 이순신은 전라도 여수 전라좌수영으로 찾아온 동생과 조카, 장남을 만나 객지에서의 군대 생활로 쌓인 회포를 푼다. 하지만 이 대목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이 설날이기 때문이다.


설날에 이순신의 동생, 조카, 장남이 충남 아산에서 어머니(봉과 회에게는 할머니)를 모시지 않고 멀리 여수로 형(봉에게는 작은아버지, 회에게는 아버지)을 찾아왔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일기에 밝히지 않고 있다. 동생과 조카, 장남에게 "어머니(할머니)를 모시지 않고 왜 여기를 찾아왔느냐?"하고 꾸짖을 만한 사안인데 말이다.

세 사람이 이순신을 찾아온 까닭은 그 다음 문장을 세심히 읽으면 가늠이 된다. 앞뒤 두 문장을 연결하는 '다만(只)'이 그 답이다. 이순신은 동생, 조카, 장남이 설날 새벽에 멀리서 찾아온 덕분에 자신의 회포는 달랬지만, '다만' 어머니를 두 해 연속 설에 뵙지 못하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순신은 지난 해 설에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올해 설에도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진작 어머니에게 알렸을 터이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나이 쉰을 바라보는 아들이 두 해 연이어 혼자서 설을 보내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으리라. 이순신의 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두 손자에게 전라좌수영으로 찾아가 형(작은아버지, 아버지)을 위로하라고 독촉했을 법하다.

이순신은 세 사람에게 "어머니(할머니)를 모시지 않고 왜 여기를 찾아왔느냐?"고 꾸짖지 않는다. 동생과 조카, 장남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어머니의 배려 덕분이라는 점을 충분히 짐작했기 때문이다. 78세의 어머니와 48세의 아들이 전쟁을 앞둔 시기에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특히 설을 맞아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는 1592년 정초(正初)의 이 장면은 그로부터 4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적신다.

전라도의 군대를 총괄하는 전라병사 최원(崔遠)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연하장과 새해 선물, 그리고 전투에 쓸 화살들을 보내왔다. 설날인데도 화살 실은 수레가 오가는 광경을 보면 최원과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1월은 정월, 1월 1일은 정초

이순신은 1월을 '정월(正月)'이라고 했다. 물론 이순신만이 아니라 옛날 사람들은 정월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즉, 정월은 1월의 다른 이름이다.

1월이 한 해의 가장 앞에 있는 첫 번째 달이므로, 정월의 정(正)은 '앞, 첫'의 뜻이다. 정(正)이 '앞, 첫'을 뜻한다는 것은 한성부윤(서울시장)과 관찰사(도지사) 중 한성부윤이 더 높은 관직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한성부윤은 정(正)2품이고, 관찰사는 종(從)2품이다. 정2품이 종2품에 비해 벼슬이 앞선다. 종(從)의 뜻이 '뒤를 따르다'인 까닭이다. 

정월의 정(正)은 '바로잡다, 고치다'의 의미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에서는 하(夏)에서 은(殷), 은에서 다시 주(周)로 임금의 성씨가 바뀌면 새해 첫날, 매달 첫날 등의 날짜를 바로잡았다. 요즘말로 하면,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난 데 맞춰 새로운 달력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력(曆, calendar)을 바꾸는(正) 기준 달(月)인 1월을 정월(正月)이라 불렀다.

11월은 동짓달, 12월은 섣달

아직도 1월처럼 다른 이름(正月)이 많이 쓰이고 있는 달에는 11월과 12월이 있다. 음력 11월은 동지(冬至)ㅅ달, 12월은 (섣달)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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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옛집 전경 ⓒ 정만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가 훌륭하게 비유해낸 것처럼, 양력 12월 22일 무렵인 동지는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즉, 동지 다음날부터는 낮이 조금씩 길어진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동짓날부터 양(陽)의 기운이 싹튼다고 생각했고, 동지부터 새해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동지 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속담이 생겨나고, 동짓날을 "작은 설"이라 부르고, 변계량(1369∼1430)이 아래 시조를 읊조린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동지에 집집마다 팥죽을 쑤었구나

양기(陽氣)가 어디서 생기는가 알자 하니

매화 남쪽 가지가 하얀 꽃망울을 터뜨린다

옛사람들은 붉은 색에 나쁜 귀신을 물리치는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악귀(惡鬼)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 위에 붙이는 부적(符籍)도 붉은 색으로 만들었다. 팥죽이 바로 붉은 빛깔의 음식이다.

동짓날을 음(陰)의 기운이 가장 강하여 귀신이 성행하는 날로 여긴 우리 조상들은 붉은 팥죽을 쑤어 방, 마루, 광, 헛간, 우물, 장독대 등에 한 그릇씩 놓았다. 또 대문이나 벽에 뿌리기도 했다. 귀신을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신앙이었다.
동짓날 팥죽을 끓일 때는 새알심이라 불리는 동그란 찹쌀떡을 넣었다. 다 끓으면 그릇에 팥죽을 담고, 또 먹는 사람의 나이와 같은 수의 새알심도 담았다. 고려 말 이제현(1287~1367)의 문집 <익재집>에는 가족들이 모여 팥죽을 먹는 풍습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이제현은 '동짓날이면 흩어졌던 가족이 모여 적소두(赤小豆)로 쑨 두죽(豆粥)을 끓여 먹었다.'라고 전해준다.

동지가 들어 있다고 해서 음력 11월을 동짓달로 불렀듯이, 12월은 설이 들어 있다고 하여 섣달이라 불렀다. 언제부터 음력 1월 1일을 설로 쇠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동지를 설날로 삼았던 더 옛날에는 동지가 지나면 새해가 열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설이 들어 있는 달, 곧 설달이 시작된 것이다. 설달은 뒷날 섣달로 발음이 바뀐다. '이틀'과 '날'이 결합하여 이튿날이 되고, "밥 한 술 떠라"고 할 때의 '술'과 '가락'이 붙어서 숟가락이 되듯이 ㄷ과 ㄹ이 오가는 발음의 호전(互轉)현상이 일어난 결과이다.

섣달은 설이 들어 있는 달이라는 의미

동짓달과 섣달을 합하면 '동지섣달'이 된다. 한겨울에 짧은 여름옷을 입어도 좋으니 다듬이 소리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동지섣달에 베잠방이를 입을망정 다듬이 소리는 듣기 싫다"는 속담이나, 한겨울에 핀 꽃을 보듯이 나를 반가워해 달라는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같은 노랫말은 동지섣달이 한겨울을 뜻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초하루는 한 달 중 첫째(一)날(日)이다. 초(初)는 보통 '처음' 뜻으로 쓰여서, 첫 전투에서 적을 제압한 것을 초(初)전박살, 처음 하는 결혼을 초(初)혼이라 한다. 초하루도 마찬가지이다. 한 달 중 두 번째 1일인 11일을 "십일일(十一日)", 세 번째 1일인 21일을 "이십일일(二十一日)"이라 하는 것과 달리, 처음 온 1일은 그냥 "일일(一日)"이라 하지 않고 "초(初)하루(一日)"라 부른다.

그러나 "정초(正初)부터 왜 다투느냐?" 할 때의 '초'는 뜻이 다르다. 이때 정은 1월을 가리키고, 초는 초하루를 가리킨다. 즉, 정초는 정월 초하루, 곧 설날이다. 초봄, 초여름, 초가을, 초겨울의 '초'는 또 다르다. 봄은 해마다 찾아오기 때문에 '처음 온 봄'이라는 표현은 성립할 수가 없다. 초봄은 '봄의 첫머리'를 뜻한다. 초하루의 초, 정초의 초, 초봄의 초는 글자는 같지만 그 의미는 서로 그렇게 다르다.

"이순신" 하면 수군이 떠오르지만 본래는 육군이었다

이순신은 32세이던 1576년(선조 9) 무과에 합격한 이래 1598년(선조 31) 전사할 때까지 군인으로 살았다. 두 번의 파직 기간 약 7개월을 육군에 넣고, 투옥과 백의종군 기간 약 5개월을 수군에 넣을 때 이순신의 군인 생활은 대략 22년 동안 이어진다. 이 중 각각 약 11년을 육군과 수군으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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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옛집의 난간 ⓒ 정만진


하지만 '이순신' 하면 수군만 떠오른다. 이순신이 1591년(선조 24) 전라좌도 수군절제사(약칭 수사)가 된 이후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생애의 마지막 8년을 수군으로 활약했고, 1592년 한산도 대첩, 1597년 명량 대첩, 1598년 노량 대첩 등 뛰어난 승전을 모두 바다에서 기록한 까닭에 그렇게 인식되었다.

수군이 육군보다 훨씬 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난중일기가 날마다 '맑다' 등으로 시작되는 것은 이순신 본인이 수군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본래 인간은 벌고 벗고 살았던 원시 시대는 물론 고도로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날씨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존해왔다. 일기를 쓸 때 날씨부터 기록하는 일은 관습으로 굳은 것일 따름이다. 해마다 이 때쯤이면 기후가 어떻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날마다 일기 맨앞에 날씨를 적는 까닭은?

인간의 삶은 농경 사회 때 특히 날씨의 영향을 받았다. 주로 농사를 지어서 삶을 유지하던 농경 사회 때는 아무리 공들여 일을 해놓아도 가뭄, 태풍, 폭우 등 자연이 훼방을 놓으면 곧장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과일이나 곡식류 등을 주워먹으며 살던 구석기 시대 채집경제 생활을 벗어나 처음으로 한곳에 머물러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원시종교(宗敎)가 탄생했다. 날씨를 좌우하는 하늘, 강, 산 등 인간보다 더 큰 존재들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점을 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낳은 풍경이다. 이순신은 막내아들 이면의 병이 염려되어서(1594.8.28.), 아내의 병이 앞으로 어떠할지 걱정되어서(1594.10.14.) 점을 친다. 심지어 이순신은 적을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1594.11.10.), 적이 오늘 싸우러 나올지 예측하려고(1596.2.7.), 원균의 장래를 알아보려고(1597.6.6.) 점을 친다.

 그 외에도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점을 치는 장면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의 이같은 점치는 행위는 그가 유난히 남들보다 점을 더 믿어서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종교의식이 그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현대종교가 자리를 잡기 이전의 농경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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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옛집 ⓒ 정만진

이희신, 이요신, 이순신, 이우신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장남 이희(羲)신의 이름을 지으면서 기원전 2,800년 무렵에 살았다는 중국 신화 속 인물 복희씨(伏羲氏)에서 따온 글자 희(羲)를 썼다. 차남 요(堯)신과 삼남 순(舜)신의 이름에는 중국 고대의 태평천하를 이룬 요순(堯舜) 두 임금에서 따온 요와 순을 썼다. 막내아들인 우(禹)신의 이름에는 요순에 이어 고대 중국을 다스린 우(禹) 임금에서 글자를 따왔다. 희, 요, 순, 우 모두 왕의 호칭에 쓰인 글자들이다. 만약 끝 글자 신(臣)을 충신 또는 신하로 해석하면 네 형제의 이름은 '충성하는 신하가 되라'로 풀이될 만하다.

신(臣)은 이순신 집안의 남자들이 서로의 관계를 쉽게 알아보기 위해 사용한 돌림자(行列字) 중 한 자였다. 이순신 네 형제의 이름 끝자에 '臣'을 쓴 것은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임의로 정한 바가 아니었다. 이정은 자신의 가문이 정해놓은 대로 아들들의 이름 끝에 '臣'을 넣었다. 그것은 항렬자(行列字)였다.

덕수이씨 집안은 이정의 아들들과 항렬이 같은 남자 후손들은 이름 끝자로 '臣'을 쓰게 정해놓았다. 희신, 요신, 순신, 우신 식으로 네 명 모두 이름 끝자로 신을 쓴 것은 그에 따른 결과였다. 이순신 형제의 이름 끝자로 쓰인 '臣'이 꼭 신하 또는 충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순신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순신 형제의 이름 끝자 신은 충신을 의미한다"고 연상될 뿐이다.

동생의 이름은 '우신'인데 어째서 '여필'이라 불렀을까

이순신은 설날 일기에서 '집(舍)의 아우(弟) 여필(汝弼)이 왔다'고 했다. 아우는 한 명밖에 없고, 그 아우의 이름은 우신(禹臣)인데 어째서 여필이라고 기록했을까? 참고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홍의장군 곽재우(1552∼1617)의 묘소 앞 묘비를 살펴본다.

곽재우의 묘비석 앞면에서 성명과 관계있는 내용은 '忘憂堂先生(망우당선생) 郭忠翼公(곽충익공)'뿐이다. 곽재우 이름 석 자는 없다. 호(號)인 망우당과 시호(諡號)인 충익만 볼 수 있다. 이는 과거의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는 부모나 스승, 임금 이외에는 함부로 인명(人名)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열(蘇烈)과 설예(薛禮)조차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를 써서 높여 불렀다. 소정방(蘇定方), 설인귀(薛仁貴) 식이다. 

옛날에는 결혼을 한 이후에는 본이름 대신 부모나 연장자가 지어준 새 이름으로 불렀다. 그 새 이름을 자(字)라 한다. 또 스스로 짓거나 벗들이 지어준 호(號)를 부르기도 했는데, 자(字)에 비해 조금 더 자유스러운 이름이었다. 그 외 특별한 인물에게는 국가에서 그가 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 시호는 현대 사회의 훈장에 해당되는 명예였다. 곽재우 묘비에 본명은 없고, 호와 시호만 새겨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게 홍의장군 묘비석만 예로 들어 설명을 하면 '곽재우의 경우에만 본명 대신 자와 호를 썼을 뿐 일반화되지는 않았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충남 아산 현충사 인근 이순신 묘소 입구와 묘역에 있는 이순신 신도비(神道碑)와 묘비를 살펴본다.

신도비는 죽은 이(神)의 묘소로 가는 길(道)을 안내하는 비석이다. 이순신 묘소로 가는 길목 들머리에 서 있는 신도비는 1794년에 정조가 직접 비문을 쓰고 빗돌을 세웠다. 이 신도비에는 이순신의 성명이 없다.

한편, 영의정 김육이 1660년(현종 1) 비문을 쓴 묘소 바로앞 묘비는 1693년(숙종 19) 건립되었다. 비문에 '李公舜臣(이공순신)'이 보인다. 성씨와 이름 가운데에 '公'을 넣은 '이공순신'이라는 표현 또한 성명을 그대로 부르는 일을 피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순신이 동생의 이름을 여필(汝弼)로 기록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여필은 이우순의 자로, 친동생인데도 이순신은 본이름 대신 자를 일기에 적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순신의 자가 여해(汝海)라는 점이다. 이순신 형제는 자에도 여(汝)를 돌림자로 써서 형제 사이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다.

아들을 "돼지"라고 부른 이순신, 고종을 "개똥이"라 부른 대원군

이순신은 '아들 회'를 '자(子) 회'로 적지 않고 '돈(豚) 회'로 적었다. 돈(豚)은 돼지이다. 자기 자녀를 남에게 이를 때 '집의 아이'라는 뜻으로 평범하게 말하면 가아(家兒)가 되지만 이순신은 낮춰서 돈아(豚兒)라 했다.

어린 자손을 낮춰서 부르는 풍습은 근래에도 이어져 연로하신 할머니들은 손자나 손녀를 "우리 강아지" 식으로 호칭한다. 이는 자손을 높여 부르면 오히려 화를 자초한다고 생각한 인식을 보여준다. 의료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어린 자손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무병장수를 기원하려면 "개똥이", "말똥이", "도야지" 등으로 낮춰 불러야 병을 옮기는 역신(疫神)이 접근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황희의 아이 때 이름(兒名)이 "도야지"였고, 심지어 조선의 사실상 마지막 임금 고종의 아명도 "개똥이"였다는 사실을 돌이켜볼 일이다.

조카 봉(菶)과 장남 회(薈)의 이름을 보면 모두 '艹'가 들어 있다. 회의 동생들인 울(蔚)과 염(苒)의 이름에도 역시 '艹'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뒷날 염(苒)을 개명하여 바꾼 면(葂)에도 '艹'가 들어 있다. 이희신, 이요신, 이순신, 이우신 네 형제의 이름에서 신(臣)이 돌림자 역할을 했듯이, 그 아래 항렬에서는 글자가 아닌 '艹'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름이 외자인 까닭에 글자를 같게 하여 항렬을 표시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순신 형제들은 아들들의 이름을 통해 한자 글자가 아니라 글자의 일부인 부수(部首)만으로도 항렬을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는 <선조실록>과 <난중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 형제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배덕문(1525∼1603) 의병장은 네 아들 설(楔), 건(楗), 력(礫), 즙(楫)의 이름에 모두 목(木)을 넣었다. 이 역시 외자 이름을 쓰다 보니 글자 자체를 같게 할 수는 없으므로 동일한 부수를 넣어 형제 사이임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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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사로 활약했던 배설 장군 형제와 그의 아버지 배덕문 의병장 등을 기려 세워진 경북 성주 숭조대 ⓒ 정만진


아버지가 하늘이지만 이순신은 어머니를 "하늘"로 불렀다

이순신은 <시경(詩經)>의 '母也天只(모야천지, 어머니는 하늘이시다)'에서 따온 천지(天只)라는 표현을 써서 어머니를 하늘(天)에 비유하고 있다. 동양의 음양 사상에 따르면 아버지가 하늘(天)이고 어머니는 땅(地)이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어머니를 하늘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기록된 약 650일 중 100일 이상을 어머니에 대해 적었다. 이만하면 이순신을 극진히 어머니를 생각한 효자라고 칭찬할 만하다.

다만 <난중일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7일뿐이어서 어머니와 극심하게 대조가 된다. 이는 이순신이 어머니만 기렸기 때문은 아니다. 난중일기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모두 선친(先親)의 제삿날에 대한 언급이다. <난중일기>가 쓰이기 시작하는 1592년을 기준으로 할 때 아버지 이정은 그보다 9년 전인 1583년에 향년 7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당시 39세였던 이순신으로서는 아버지에게는 효도를 다하려고 해도 시간이 이미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순신은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樹欲靜而風不止) 자식이 효도를 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子欲孝而親不待)"는 공자의 가르침과, 정철(1536∼1593)이 지은 <훈민가(訓民歌)>의 내용을 되새기며 아버지에 대한 못다 한 효도를 안타까워하고 또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고 난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일평생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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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옛집 ⓒ 정만진

이순신의 증조할아버지 이거(李琚)는 성종 때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정3품인 병조참의는 지금의 국방부 차관보 정도였으므로 상당히 높은 벼슬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1597년 3월 15일자에는 류성룡이 선조에게 이순신을 "성종 때 이거의 자손'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은 조선 시대 벼슬 증 가장 낮은 종9품 바로 위인 종8품 봉사(奉事)를 지냈다. 아버지 이정은 아예 벼슬이 없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순신 집안의 사회적 지위는 현격히 낮아졌다.

서울에서 아산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집을 서울에서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버렸다. 아산은 이순신의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1592년 설날 현재 이순신의 어머니 변씨는 아산에 머물고 있다. 어머니의 당시 나이는 78세였다.

그런가 하면, 이순신의 아내는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딸로, 방진은 문관이 아니라 무관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추정은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근거를 둔다. <이충무공전서>에 남아 있는 방진 관련 옛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이순신의 아내 방씨가 12살 때 일이다. 화적들이 집의 안마당까지 몰려 왔다. 평소에 명궁 소리를 들어온 아버지 방진이 활로 도둑을 쏘던 중 화살이 떨어졌다. 방진이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방 안에는 화살이 없었다. 도둑들이 계집종과 내통하여 화살을 모두 빼돌렸기 때문이다.

방씨는 당황하지 않고 기지를 발휘했다. 급히 베 짜는 데 쓰려고 다락에 보관해 두었던 대나무를 한 아름 안고 나와 바닥에 던졌다. 대나무들이 요란하게 떨어지자 도둑들은 화살을 던져서 나는 소리로 들었다. 방진이 활의 명수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도둑들은 아직도 화살이 많이 남은 것으로 여기고 놀라서 도망쳤다.'


이 이야기는 방진이 무관 출신이라는 점을 추측하게 해준다. 또 이순신의 아내가 매우 '영민(<이충무공전서>의 표현)'했다는 사실도 증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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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어머니를 전라좌수영 옆으로 잠시 모셔와 사시게 했던 여수 옛터에는 집이 복원되고 자당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사진은 복원된 집의 방 안에 이순신과 어머니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는 모습이다. ⓒ 정만진


설은 추석과 더불어 우리나라 2대 명절의 하나이다. 한자어로 추석(秋夕)인 한가위는 신라 초기에 이미 존재했다. 한가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기원후 32년(유리왕 9) 신라 여성들이 길쌈짜기 시합을 한 후 8월 보름날이 되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가배(嘉俳) 행사를 가졌다는 <삼국사기>의 증언이다. '크다'를 뜻하는 '한'과 '가을의 가운데'를 뜻하는 '가위'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한가위는 가배의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다.

설은 언제부터 우리의 명절이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수서(隋書)> 등의 중국 역사서에 신라인들이 원일(元日) 아침에 서로 하례하고, 왕이 군신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일월신(日月神)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한 것은 분명하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날이 정월 대보름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시대에도 왕은 정월 초하루 원정(元正)을 전후하여 천지신(天地神)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관리들에게 7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고려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를 맞아 집집마다 다니며 새해 인사를 나누었고, 악귀(惡鬼)를 쫓기 위해 문에 붉은 부적(符籍)을 붙이기도 했으며, 연하장도 보냈다. 난중일기 1592년 설날 일기에 전라병사가 이순신에게 보냈다는 편지도 연하장 성격의 글이었을 것이다.

설날의 의미, 설날에 행했던 옛사람들의 풍속

설날 아침에는 조상에게 차례(茶禮)를 지낸다. 차례와 기제사(忌祭祀)는 다르다. 기제사는 돌아가신 분의 사망일을 기려 밤에 지내지만, 차례는 설, 추석, 동지, 한식, 칠석, 단오,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 등의 아침에 모든 조상들을 기려 지낸다. 근래 들어서는 차례 풍습도 많이 변하여 설과 추석에만 지내고, 모든 조상이 아니라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4대조까지만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날에 입는 새옷을 '설빔'이라 했다. 설에는 떡국을 먹었다. 길이가 매우 길고(長壽) 흰(無病) 가래떡으로 떡국을 만들어 먹으면서 우리 민족은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빌었다. 길고(長) 깨끗한(白) 가래떡은 무병장수를 상징할 만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설에는 연을 날렸다. 연날리기는 섣달그믐부터 대보름까지 계속 되었다. 특히 대보름날에는 연을 아주 날려 보냈다. 그래서 대보름날의 연을 액연(厄鳶)이라 했다. 나쁜 것(厄)을 멀리 날려 보내는 연이라는 뜻이다. 대보름날 이후에는 연을 날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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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연 ⓒ 이현복


설은 음력 1월 1일이다. 설의 다른 이름 중에는 원단(元旦)과 구정(舊正)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원단은 으뜸(元)가는 해뜨는(旦) 날이라는 뜻이고, 구정은 양력 1월 1일인 신정(新正)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새해부터는 모든 언행에 신중해야 한다는 뜻에서 음력 1월 1일을 신일(愼日)이라 부르기도 했다.

설날은 새해 첫날이므로 한 해(年)의 한 간지가 끝나고 새 간지가 시작되는 날이다. 따라서 새해 첫날은 지나간 1년에 비해 낯이 설다(익숙하지 못하다). 설이라는 이름이 '설다', '낯설다'에서 유래했다는 해석이다. 또, 1월 1일이 되면 한 살 더 먹기 때문에 서러워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설과 살이 같은 뜻이며, 한 살 더 먹는 날을 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견해와 비슷하다.
설과 살이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옛날 책에서 확인된다. <월인석보>의 '그 아기 닐굽 설 먹어', <두시언해>의 '아홉 설에', <내훈>의 '여덟 설에 비로소' 등으로 나오는 '설'은 모두 '살'의 뜻이다. 이 표현들은 '설'을 '살'의 뜻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현재 '다섯 살'과 '5세(歲)'가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살과 설이 같은 뜻임을 말해준다.

세(歲)가 설인 것은 이순신이 1592년 설날 <난중일기>에 쓴 '再過(재과)'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된다. 이순신은 '(어머니와 멀리 남쪽에 떨어져서) 설을 두 번 지나치니'를 한문 원문에 '再過'로 기록했다. 재(再)는 '다시 재'이므로 두 번을 가리키고, 과(過)는 본래 '지나가다'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과세(過歲)'를 한 글자로 줄여 쓴 표현이다. '再過'를 '설을 두 번 지나치니'로 번역하는 것은 세(歲)가 설, 과세(過歲)가 '설을 쇠다'의 뜻인 까닭이다.

이순신이 같은 날 일기에 '설 선물'을 세물(歲物)로 표현한 데서도 세(歲)가 곧 설이라는 사실은 확인된다. 설(歲)에 어른께 올리는 절(拜)을 세배(歲拜)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설날에 무기를 주고받는 전라병사와 전라좌수사

조선 시대에 도(道) 단위 지역에 주둔하는 육군을 총지휘한 종2품 무관을 병사라 불렀다. 따라서 병사는 요즘의 중장 정도에 해당된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도절제사라는 이름으로 설치된 이 관직은 1466년(세조 12)에 병마절도사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병사는 병마절도사의 약칭이다.

병사는 모두 15명로, 임기는 2년이었다. 8도 행정 체제인 조선에 15명의 병사가 주둔한 것은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되는 8도의 관찰사가 문관이면서도 병사를 겸임한 외에, 충청도·전라도·평안도·경상좌도·경상우도·함경남도·함경북도에 전임(專任) 병사를 1명씩 더 두었기 때문이다.

병사가 근무하는 주진(主鎭)을 병영(兵營)이라 했다. 병사 아래에는 부사령관에 해당하는 우후(虞侯), 장교인 군관(軍官)들, 그 외에 많은 군사, 아전, 노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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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진남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근무하던 당시 이곳에 있던 진해루는 소실되었고, 진남관은 그 터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 정만진


그런가 하면, 육군의 병사에 해당되는 수군 지휘관을 수사(수군절제사), 병영에 해당하는 수군 주둔지를 수영이라 했다. 수사는 관찰사의 지휘 감독을 받았으므로 조선 시대 수군은 사실상 육군 소속이었다. 수영은 바다를 통해 외적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높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집중적으로 설치했는데 특히 전라도의 경우, 육군 병영은 한 곳 설치하면서 수군 수영은 두 곳을 두었다. 그만큼 전라도는 경상도와 더불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하는 필요성이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관찰사가 겸임하는 수사 외에 전임 수사의 주진 위치는 충청도 보령(충청수영), 부산 동래(경상좌수영), 거제 가배량(경상우수영), 여수 오동포(전라좌수영), 해남(전라우수영) 등지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8월 전라도·경상도·충청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약칭 통제사)를 설치하고 총 지휘본부인 수군통제영(약칭 통제영)을 두었다. 통제영은 당시 상황에 따라 한산도·여수·고성·충무 등지로 옮겨졌고, 1895년(고종 32) 폐지되었다. 초대 통제사는 이순신, 2대 통제사는 원균이었다. 그러므로 1592년 설날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쓰기 시작한 곳은 여수 전라좌수영이었다.

해미읍성에서 육군으로 근무했던 이순신

군관은 조선 시대 중앙과 지방의 군사기관에 소속되어 군사 관계 일을 맡아본 무관으로 임기는 1년이었다. 병사가 머물고 있는 각 도의 주진(병영)에 각 5명씩 배치되었다. 다만 수군을 남해안 쪽에 더 많이 배치한 것과 달리 육군 군관은 북방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계(兩界)의 주진에 각 10명씩 배치하여 외적의 육로 침범에 대비했다.

해미읍성에서 이순신은 1578년(선조 11) 중 약 10개월을 군관으로 근무했다. 이순신이 충남 해미읍성에서 근무한 경력을 통해 군관이 어느 정도 관직이었는지를 추측해본다. 지금은 작은 시골이지만 조선 시대의 해미는 지금과 달랐다. 해미에는 1421년(세종 3)부터 1652년(효종 3)까지 약 230년 동안 충청병영이 있었다. 해미는 서해안으로 침범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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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육군 군관으로 근무했던 해미읍성 ⓒ 정만진

이순신은 1576년(선조 9) 무과에 4등으로 급제하여 종9품 권관(權菅)이 되고 3년 후 종8품 봉사(奉事)가 된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이순신은 정4품 병조정랑(국방부 인사과장 정도) 서익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는 데 반대하다가 해미읍성 군관으로 밀려난다. 이 일은 군관이 8품보다 높은 관직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기룡의 경력도 군관의 지위를 짐작하게 해준다. 정기룡은 25세 때인 1586년(선조 19) 무과에 장원 급제한다. 정기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경상우병사 조경의 군관으로 추풍령 전투를 치른다. 그 후 정기룡은 종8품 봉사를 거쳐 종6품 판관(判官)으로 승진한다. 정기룡의 경력 역시 군관이 종8품보다 높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병사가 보내온 화살은 어떤 무기였을까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화살들이다. 글자로만 해석하면 장전은 '길 장'과 '활 전'이므로 긴 화살, 편전은 '조각 편'과 '활 전'이므로 짧은 화살이다. 장전은 무게가 1냥(1냥=37.5g=10돈) 조금 넘었다. 그에 비하면, 작다고 하여 속칭 "애기살"이라 불린 편전은 보통 화살의 절반 정도인 36cm 내외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효 거리가 1,000보步에 이르고 화살촉이 예리하여 철갑을 뚫었다. 조선 군사들은 특히 편전을 잘 쏘아 "중국은 창, 조선은 편전, 일본은 조총"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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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화살들 ⓒ 전쟁기념관



조선 시대에는 대략 여덟 종류의 화살이 쓰였다. 예전(禮箭)은 궁중 예식 때 사용한 화살이었다. 나무로 만든 목전(木箭), 무게가 6냥이나 된다고 하여 일명 육냥전(六兩箭)이라 불린 정량전(正兩箭), 정량전보다도 무게가 8배 안팎이나 되도록 무거워 대포처럼 포노(砲弩)로 발사하여 적의 배를 파괴하는 장군전(將軍箭)도 있었다.

그 외 전투 중에 말을 탄 채 쏘는 기사용(騎射用) 화살인 대우전(大羽箭), 화살촉이 버들잎처럼 생긴 유엽전(柳葉箭) 등도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화살은 연습용으로 이용되는 유엽전뿐이다.

명궁으로 이름을 날린 이성계와 주몽

이성계는 활을 잘 쏜 것으로 유명했다. <고려사>에는 '이성계가 대우전 20개를 쏘고 계속하여 유엽전을 날리니 50여 발이 모두 (왜구의) 얼굴을 맞추었다. 시위소리에 날 때마다 거꾸러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활을 날려 왜구들을 무수히 격퇴한 이성계는 최영과 더불어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고, 마침내 조선을 세웠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도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주몽이라는 이름 자체가 '나라 안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22살 무렵 비류왕과 국토를 다툴 때 "전쟁을 하지 말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는 비류왕의 제안을 수락했는데, 시합에서 주몽은 100보 떨어진 곳에 반지를 걸어놓고서 그 동그란 테 가운데에 화살촉을 명중시켰다.

활은 구석기 시대부터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순신은 활을 궁(弓), 화살을 전(箭)으로 적고 있지만, 활과 화살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중국 송나라 사람 손목이 12세기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계림유사>에 고려에서는 "弓曰活(궁을 활이라 한다)", "射曰活索(쏘기를 화살이라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天曰漢捺(천을 하늘이라 한다)", "鬼曰幾心(귀를 귀신이라 한다)" 등 고려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 353개가 수록되어 있는 <계림유사>는 우리 옛말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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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옛집 오른쪽 뒤에 있는 활터로, 이순신 장군이 과거 준비를 할 때 활쏘기 연습을 했던 곳이다. ⓒ 정만진


충무공 옛집 뒤에는 이순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했던 터가 남아 있다. 안내판은 '이 활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활을 쏘시던 장소로, 남쪽에 있는 과녁과의 거리는 145m입니다. 그리고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으로 일명 치마장이라 부릅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 년에 이르며,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활을 쏘는 사대 위에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 활을 한 번 쏘아보고 싶으리라. 나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며 활 시위를 힘차게 당겨보고 싶다. 설날 어머니를 그리워한 이순신처럼 나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하지만 충무공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당시 장군의 모친은 아산에 살아 계셨지만, 나의 어머니는 호국원 묘역에 누워 계시니, 이를 어쩔 것인가.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효도를 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
#이순신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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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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