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의 한국어판 표지.
글항아리
돈이 돈을 낳는다Chaebol(재벌) - A South Korean form of business conglomerate(company). There are several dozen large Korean family-controlled corporate groups which fall under this definition. 한국의 가족 중심이면서도 그 규모가 매우 큰 회사를 뜻하는 말로 옥스퍼드 대사전과 위키피디아에 등록되어 있는 단어다. 위키피디아에는 chaebol(재벌)말고도 우리말 단어가 하나 더 등재되어 있는데 바로 ajumma(아줌마)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한국의 재벌 문화와 아줌마들의 억척스러움이 두드러져 보였나 보다. 재벌과 아줌마. 이 두 단어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일까? 2014년, 이에 대한 가장 적확한 분석이 공교롭게도 한 프랑스 경제학자로부터 나왔다. 토마 피케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피케티의 논리를 단순화 시켜서 <21세기 자본>을 한 줄로 줄인다면 '돈이 돈을 낳고 있고 이는 앞으로 더 큰 경제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는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부의 대물림인 '세습 자본주의'에 대해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음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중이다.
사회과학의 존재 목적이 무엇일까. 세상의 구조와 원리를 분석하고 이해하며 그것의 문제점을 파악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학자는 기존의 자료를 기반으로 자신의 연구를 통한 식견을 정리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300여 년간의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심층 구조와 작동 방식을 분석하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세습되는 문제를 파헤쳤다. 더불어 불평등의 심화가 정치적 파탄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가치관에 근거하여 최상위 부유층에게 글로벌 누진세를 매기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해 일갈한 다른 유수의 경제학자들도 많았으나 왜 유독 피케티에게만 '현상'이 나타났던 것일까? 그 이유는 마치 근래 각광받는 빅 데이터 조사에 따른 트렌드 분석처럼 굉장히 상세한 통계 분석에 있다. 이 책은 기존의 경제 분석 책보다는 훨씬 방대하고 구체적인 자료를 담는다. 게다가 제인 오스틴,오노레 드 발자크의 작품들 같은 문학적인 컨텍스트(context)도 반영되어 있어 읽는 관점을 더 넓혀주고 있다.
이를테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자매들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모습을 세습 자본주의에 열광하는 모습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태가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주지 시켜준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을 인용한 부분은 더 흥미롭다.
'만약 라스티냐크가 같은 하숙집에 살고 있고 수줍음이 많으며 오로지 그만 바라보는 빅토린 양과 결혼한다면 당장 100만 프랑의 재산을 손에 쥘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고작 스무 살에 매년 5만 프랑의 이자소득(자본의 5% 수익)을 얻게 된다. 몇 년 뒤에나 검사의 월급에서 기대할 수 있는 안락한 생활수준의 10배(당시 파리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들이 수년간 고생하고 온갖 수완을 발휘해 쉰 살이나 되어서야 얻을 수 있는 소득)를 곧바로 얻는 것이다. 결론은 분명했다. 빅토린 양이 특별히 예쁘거나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라스티냐크는 그녀와 서둘러 결혼해야 한다.' (본문 p.290 中에서)
<고리오 영감>을 하나의 컨텍스트로써 피케티가 설명하고자 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고 명확하다. 상속재산이 노력과 재능에 대한 보상을 압도하는 체제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빅토린과 결혼을 하면 100만 프랑의 재산을 손에 쥐고 매년 5만 프랑의 이자소득을 얻는다고 했으니 당시 프랑스의 자본 수익률이 대략 5%가 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r(자본소득) > g(노동소득)책에 의하면 최근 3세기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 직후 30년을 제외하고는 자본에 의해 자본을 얻는 자본 소득이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인 노동 소득보다 언제나 높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간극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통계로서 증명을 한다. 이에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 부자들의 소득 증가는 곧 소비로 이어져 저소득층의 소득 증가에도 이어진다는 것)'를 이야기하며 현대의 자본주의에서는 불평등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피케티는 부자들의 저축은 경제 성장을 낳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한 부의 집중을 야기하고 이를 통해 세습 자본주의가 이룩된다고 그들의 논리에 반기를 든다. 능력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에 대한 원칙적인 부정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다시 재벌과 아줌마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우리나라에서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고 좋은 직장에 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있다. 할아버지의 재산과 아빠의 무관심 그리고 엄마의 치맛바람. 이 세 가지면 자식은 무조건 명문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웃프지만(웃기면서 슬프지만) 사실이다. 할아버지가 축적해놓은 부(富)를 가진 집안에서 아빠는 묵묵히 돈만 벌어오면 되고 엄마가 다 알아서 자식 농사를 짓는 것이다. 재벌과 아줌마. 영어사전 속 단어들 그리고 피케티의 메시지가 적확하게 우리나라의 세태와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소득 불평등의 시대비록 상위 소득자들에게 부유세를 80%씩 부과하는 것이 매우 급진적인 정책으로 판단되어 굉장한 역풍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피케티의 말처럼 소득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교육 투자, 공교육 정상화 등의 주의 깊은 접근은 분명 세습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피케티는 '경제 교과서의 아버지'라 불리는 <맨큐의 경제학> 저자 그레고리 맨큐 교수와 각자의 경제에 대한 논리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피케티는 맨큐 말고도 빌 게이츠를 비롯해서 시장경제 신봉자들과도 견해를 주고 받으며 경제에 대한 진단을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본인의 논리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옳고 그름의 여부를 떠나 자신의 주장을 반복해서 재검토하는 순간, 그에게서 용기있는 학자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피케티가 한 수 물렀다고 해서 피케티의 논리가 패배했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친기업적인 신용평가회사로 알려진 S&P(스탠다드 앤 푸어스)사도 최근의 보고서에서 미국의 경제 회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소득 불평등임을 인정했다. 과거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주장했듯이 피케티의 주장이 세계 경제의 헤게모니를 차지할 가능성은 아직 열어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피케티의 주장이 세계 경제계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는지 좀 더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거의 모든 대선후보들이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것도 역시 우리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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