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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배우에 '낙인'과 '폭력'... 우리는 다른 영화를 꿈꾼다

내가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페미'에 연대한 이유

17.03.11 15:15최종업데이트17.03.1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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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위성은씨는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페미' 신입회원입니다. 이 글은 8일 여성의날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에 참석해 지지발언을 하고자 했으나 참여하지 못해 온라인으로 대신 올리는 위성은씨의 지지발언입니다. [편집자말]

8일 오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서초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여러 여성 단체들이 모여 '이건 영화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는 이름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촬영 도중 성폭력을 저지른 남자 배우 A씨의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하고 영화계 내부에 만연한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유지영


영화로 한때나마 밥벌이를 했던 여성노동자로서, 이 글을 씁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저는 "여배우가 옷도 잘 벗고 그래야지"라는 말로 시작하겠습니다. 상업영화가 아니라 IPTV를 노린 저예산영화 현장이었기에 벗으면 돈이 되고 리얼할수록 더 각광받게 된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노출신에 연연하지 않는 배우는 영화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며 현장에서 칭송의 대상이 되지만, 막상 노출이 부각되면 그 장면만 '엑기스'로 짜깁기돼 돌아다니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볼 장 다 봤다"는 악플이 달리고, 노출 영화로 뜬 배우는 연기에 대한 진지함을 인정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구직 사이트만 봐도 노출이 없는 시나리오를 지명도가 없는 배우가 만나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에서 최소한의 입지를 갖고자 고민과 용기를 내어 한 행동은 배우로서가 아닌 여성의 행실에 대한 낙인으로 돌아옵니다.

여배우의 몸은 공공재이고 영화의 핵심적인 눈요깃거리여야 한다는 것이 언제부터 이토록 당연하고 뻔뻔한 명제가 됐을까요.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이 피해자 탓이 되고, 쉽사리 처벌받지 않는 현실이, 피해자가 자신의 귀책이 없음을 증명해야만 무죄임을 인정받는 현실이 이런 편견을 강화한 것 아닐까요. 범죄나 폭력를 고발한다는 빌미로 성폭력 장면이 선정적으로, 리얼하게 재연될 때마다 이를 연기해야만 했던 여성 배우들의 고통이 느껴져 영화에 제대로 몰입할 수 없습니다.

추행은 '추행'입니다

많지 않은 현장에 참여했지만 때로는 추행을 목격하거나 피해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남배우A'의 성추행 문제를 제기해주신 당사자분, 그리고 영화 <전망 좋은 집>을 촬영하며 본인이 겪은 성폭력을 용기 있게 증언한 배우 곽현화씨 덕분입니다.

남배우A가 한 영화 촬영 도중 한 행동을 보고서 정말 눈을 의심해야 했습니다. 영화 촬영 도중 협의도 하지 않은 채 여배우에 그가 무차별적으로 가한 성폭력은 경악할 수준이었고 철저한 계획하에 여배우를 기만하고, 폭행하고, 성적인 자기결정권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자유의지를 무시한 처사였습니다.

현장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차마 촬영을 중단할 수 없었던 피해자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일을 저질러 놓고 상대 배우도, 제작자도, 감독 그 누구도 책임지거나 사과하기 않았기에 결국 재판까지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심 재판부는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70년간 영화계에서 추행이란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그럴 수 없다'고 일축합니다. (관련 기사: "살인신 찍을 때 정말 찔렀나? 부끄러운 줄 알아라")

▲ 일종의 피켓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철렁하고, 누군가에게는 지지와 위안이 되는 말들 아닐까. ⓒ 위성은


왜 추행을 추행이라고 말할 수 없는지, 70년간 굳어진 두꺼운 벽에 균열을 내는 일이 왜 온전히 피해자의 몫인지 모르겠습니다. 싸우기에도 급급한 사람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닐까요. 재판부의 1심 판결은 더 '리얼'한, 폭력적인 장면을 즐기고 싶은 남성들 간의 굳건한 연대인지, 자신의 매력을 팔아야 하는 배우가 이런 상황에 처해도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추행은 추행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피해당사자가 입은 일에 책임을 지고, 다시는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경고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찍는페미'가 그것을 바꾸는데 작은 실마리가 됐으면 합니다. 사전에 동의하지 않은 장면이 현장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일은 없어져야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우리는 꿈을 꿉니다. 결혼이나 출산으로,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로, 체력이 예전만 못해서 영화판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지긋한 연배가 되어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고, 헤드스탭이 돼 현장에서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나는 것을 제지할 수도 있고, 영화는 잘 찍지만 성폭력 가해를 일삼는 감독을 몰아낼 수 있길 바랍니다. 합의되고 연출된 장면이 아닌 실제 폭력이 등장하는 장면은 스크린에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피해 당사자 분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계속 연대하고 또 발언하고 '찍고 쓰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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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하셨습니까>를 썼고 인권, 여성 분야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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