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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연대가 흐뭇한 당신께, 이건 휴머니즘이 아니다

[리뷰] 영화 <죽여주는 여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봐도 괜찮을까요?

17.04.08 21:30최종업데이트17.04.0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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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다.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국가의 방향을 말한다. 대선 주자들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럴 때일수록 소수자의 목소리는 묻힐 위기에 처한다. 소수자의 표는 소수이기 때문에. 그래서 소수자는 연대한다. 인권이라는 공감대 안에 그들은 손을 잡고 다수가 되고자 노력한다. 이런 와중에 걱정되는 점이 있다. 연대를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만이 아니다. 흐뭇한 시선 또한 걱정이다. 대선 앞에서 갈 길이 먼 소수자 문제를 바라보며, 작년에 개봉한 영화 한 편을 다시 틀었다. <죽여주는 여자>다.

영화 이야기에 앞서 두 개의 경험을 소개해야겠다.

하나, 종로 3가에서 경찰관에게 신고하는 어떤 아저씨의 말을 들었다. 탑골공원에 박카스 할머니들 단속해야 한다고. 할아버지들 없는 돈 털린다고. 비아그라 먹어도 서지도 않는 거 가엾다고. 난 그 아저씨가 단속을 요구한 이유가 궁금했다. 사회의 치부를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던 건 아닌지.

둘, 이 영화를 한낮 3호선 열차 안에서 봤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노인 사이에 껴서 가게 된 것이다. '65세 이상 관람 불가' 영화라도 된다는 듯이, 영상 창을 노트북 화면 구석으로 숨겼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죽여주는 여자> 보려는데 괜찮을까요?" 개봉 당시 인터넷에 올라와 있던 질문이다. 채택 답변 왈,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행복하던 분이 자기 처지를 자각하고 외로워지거나, 외롭던 분이 더 외로워지거나" 란다. 문득 드는 생각. '아니 근데 노인 외로운 게 뭐, 어제오늘 일인가. 새삼 영화 가지고 왜 이래? 우리가 이 영화를 그들과 나누기 껄끄러운 이유, 그게 박카스 할머니 단속을 요구하던 아저씨의 이유와 같은 건 아니야?'

벽 그리고 소수자

2016년 개봉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을 중심으로 한 소수자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 CGV아트하우스


이 영화는 단속을 요구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 소수자 자신들의 이야기다. '죽여주는 여자' 소영은 가난한 노인 여성.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약자의 보편적 집합체다. 탑골공원의 '박카스 할머니'인 소영이 노쇠한 단골들의 부탁으로 자살을 돕는 것이 주된 이야기다. 영화에는 탑골공원과 이태원 뒷골목을 배경으로 온갖 소수자가 등장한다. 한국인 아빠에게 외면당하는 코피노 꼬마, 한쪽 다리가 목발인 장애인, 이태원 바에서 노래하는 트랜스젠더. 이들이 소영과 한집에 산다. 그들은 서로를 돕는다. 걱정하며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단속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얼핏 보면 따뜻하다. 감동적이다. 이것이 대안 가족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안 가족은 타의로 세워진 벽이다. 벽을 세운 것은 소위 말하는 '일반인'이다. 탑골공원과 이태원 뒷골목이라는 벽으로 소수자와 '일반인' 사이가 가려진다. 우리 사회의 난치병은 벽 안으로 숨는다. 우리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된다. 단속은 벽 밖의 고민거리다. '일반인'들은 벽 안이 행복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성매매와 공조 자살 단속을 요구한다. '일반인'들이 벽 안의 고통을 두려워할수록, 벽 안의 문제는 더욱 벽 안의 몫이 된다.

영화에선 벽 밖의 시선이 언뜻언뜻 보인다. 세비로송의 가족들은 부검하지 않은 채, 자연사로 그의 죽음을 덮는다. 뉴스는 재우의 죽음을 보험금을 노린 살인이라고 보도한다. 벽 밖에서 외면한 노인들의 고통은 벽 가장 안쪽에 있는 소영이 마주해야 했다. 소영은 세비로송에게 농약을 먹이면서 몸을 떨었고 죽은 재우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노인들조차 자신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그녀를 이용한다. 죽음의 순간에 함께 있어 달라는 재우의 부탁을 소영은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모든 부담은 소영의 것이었다. 덕분에 벽 밖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소영의 짐을 함께 들어 주는 것은 그녀의 '대안 가족'뿐이다. 그들은 소영이 부탁을 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항상 도와준다. 무심한 듯 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이처럼 소수자는 항상 연대해 왔다. 벽 안의 목소리는 벽 안에서 잘 들리는 법이니까. 그 연대는 불가피한 것이므로 자연스럽다. 그 연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벽 안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의 시선이다. 그러나 연대에 대한 못마땅한 시선에만 벽 안이 곪는 것은 아니다. 그곳은 흐뭇한 시선에도 곪는다. 흐뭇함은 관람객의 태도다. 벽 밖이 흐뭇하게 바라볼 때도 벽 안은 아프다. 흐뭇한 시선은 소수자를 타자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벽이 두꺼워질수록 소영과 같은 희생자는 늘어난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트렌스젠더 티나, 장애인 도훈, 박카스 할머니 소영과 코피노 민호는 한 집에 살며 서로를 돕는다 ⓒ CGV아트하우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영화 속에 소영을 취재하려는 젊은 PD가 나온다. 할머니도, 이모도 싫다는 소영은 그에게 아예 "부르지 마"라며 호칭을 내주지 않는다. 그 대사만큼 두꺼운 벽이다. 그러나 그는 그 벽을 허물고자 한다. 그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나 '사랑 이야기'가 아닌 '소영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이재용 감독은 PD를 통해 문제의 해결법을 제시한다. 벽 안의 문제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감상법은 다음과 같다.

'소수자들의 상부상조를 보면서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자위하지 말자.'

소수자 연대는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권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흐뭇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통스러워해야 한다. 소수자에게 연민의 시선 한 번 보내고선 뿌듯해하지 말자. 비아그라가 세우지 못하는 그걸 핑계로 사회의 난치병을 못 본 체하지 말자. <죽여주는 여자>는 대선을 앞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죽여주는 여자> 보는 것은 여전히 고민해 봐야 한다. 하지만 그건 버릇없다고 혼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을 마주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소수자 박카스 할머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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