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닫고 입 닫은 대법원장, 박근혜 전 대통령 닮지 말길...

[取중眞담] 민주주의 최후 보루라더니... 내부 비판도 틀어막는 법원이었나

등록 2017.04.20 21:21수정 2017.04.2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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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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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에 천칭저울을 글고 왼손에는 법전을 안고 있다. ⓒ 권우성


지난 17일,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아래 조사위)의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의혹 조사 결과 보고서를 읽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이규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2015년 9월 9일 인사모 주요 회원들과 저녁자리에서 '법원 예산으로 공식 사이트를 사용하는 연구회가 법원행정처에 반대하는 모임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얘기하고...

인사모는 판사들의 연구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 내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의 줄임말이다. 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법관 인사제도 등을 논의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하려 했다는 의혹을 조사한 결과, 법원행정처가 이 연구회뿐 아니라 인사모를 오랫동안 주목해왔다고 발표했다. 설립취지인 '국제인권 연구'와 무관한 사법제도·행정을 다루는데다 진보성향 판사모임 '우리법연구회'와 비슷한 주제를 논의한다는 이유였다.

'윗선 반대는 나쁘다?' 블랙리스트와 닮아

이 상임위원은 이 맥락에서 "인사모 활동이 옳지 않다"고 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얘기였다. 김기춘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계 지원배제명단(블랙리스트) 작성과 적용이 정당하다며 하는 말이었다.

"김기춘 피고인은 안보를 저해하거나 정책 시행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의심되는 작품에 정부 예산을 들여가며 지원하는 게 맞냐고 큰 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굳이 그런 작품활동에 정부가 돈까지 들여가며 지원할 필요가 있냐는 얘기다(4월 6일 1차 공판 변호인 모두진술).

'정부에 반대하면 정부 지원을, 법원에 반대하면 법원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긴커녕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이규진 상임위원 발언은 김기춘 전 실장쪽 주장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이런 말이 판사의 입에서, 사법부 안에서 나왔다는 점이 더 충격이었다.


조사위 보고서를 넘길수록 충격은 더해졌다.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은 2015년 7월 인사모 활동이 법관윤리강령 등을 저촉하는지 검토했고, 위반사항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인사모는 같은 달 7일 법원 내부전산망에 처음 설립 제안이 나왔고, 8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아는 판사들은 '윤리감사관실의 소모임 활동 사전 검토는 난생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을 보였다.

비위를 저지른 법관을 감찰하는 윤리감사관실이 준비단계인 소모임을 들여다본 이유는 무엇일까? 인사모의 누군가 혹은 인사모 전체를 '요주의 인물'로 여겼기 때문 아닐까? 한 판사는 "윤리감사관실은 소모임 동향 등을 자발적으로 조사하는 데가 아니다, 위에서 뭔가 지시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일을 인사모 활동을 우려한 이 상임위원의 돌출행동처럼 묘사한 조사위 보고서를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법원은 재판만 하는 곳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뒤섞이는 곳이 민주주의체제다. 특히 '쓴소리'는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한다는 증거다.

우리는 수십 년 전, 단지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온몸으로 국가폭력에 억눌려야 했던 시대를 경험했다. 법원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반성했고 사죄했다.

하지만 2017년 봄, 사법부는 민주주의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지 묻고 싶다. 남의 눈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궁금하다. '사법부 관료화를 막기 위해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내부 비판을 받아들이긴커녕 그 이유로 판사들의 '불손함'을 의심하는 듯한 모습은 '시끄러운 민주주의'보다 '조용한 독재'를 바라는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대법원은 '조용한 독재'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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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 2016년 9월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 굳은 표정으로 입장하고 있다. 이날 양 대법원장은 현직 부장판사의 뇌물수수사건과 관련해 대국민사과를 했다. ⓒ 공동취재사진


20일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은 뒤늦은 사과문을 내놨다. 조사 결과가 나온 지 3일 만에 나온 글에는 "조사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겸허히 수용하며 합당한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해명이 담겨있었다. 또 "이번 사태로 드러난 여러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법관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고 모든 법관들이 수긍할 수 있는 방향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사법행정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사법부 안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 다른 목소리를 가진 국민들 의견이 법대 앞에서 공정한 판단을 받는다. 내부의 민주주의를 의심받는 법원은 과연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는가.

알비 삭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초대 헌법재판관은 "판사는 국가가 실험대에 올랐을 때 나라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판사의 소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법관은 판결로만 나라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법원 안의 민주주의를 의심받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사법부 수장, 양승태 대법원장은 침묵하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귀를 닫고, 끝내 입도 닫은 그의 모습에 자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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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양승태 #사법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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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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