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일 선체 내부 수색 이틀째를 맞은 세월호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날 세월호에서는 4층 객실부에 해당하는 A데크에서 스마트폰이 추가로 발견됐다.
해양수산부
하지만 여기서 끝내기엔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이제까지 반복된 참사는 몇몇 나쁜 기업과 정부 잘못이고,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안심해도 될 문제일까?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불의, 즉 '구조적 부정의'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속한 제도가 부정의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거나 혹은 그런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동원해 그 제도에 반대해야 하고 반대 의사를 드러내야 할 정치적 책임을 진다. 그리고 제도를 변화시켜 더 나은 결말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함께 행동해야 할 정치적 책임을 진다." -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166쪽아이리스 영의 주장 대로라면 수많은 재난을 낳은 '구조적 부정의'를 목격한 우리에게도 그것을 바로잡을 정치적 책임이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책에 나온 여러 재난 가운데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대목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나 19년을 살았고,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일어난 2003년에도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연히 TV와 신문에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 대한 기사도 봤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으며 새로 안 사실이 많다.
나는 상인동 가스폭발참사가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몰랐고, 역시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신남네거리 공사장 붕괴사고는 존재조차 몰랐다. 이원준 대구지하철노동조합 당시 위원장이 참사 당시 안전 문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다 임금 등 노동조건과 관계없는 사안으로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불법파업으로 몰려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물론 이런저런 핑계를 댈 수는 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지하철이 다니지 않아 참사 이전에 지하철 안전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주변 사람 가운데 참사로 죽거나 다친 사람도 없었다. 상인동 가스폭발참사나 신남네거리 공사장 붕괴사고도 모두 내가 사는 동네와는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그 어떤 핑계를 댄다 해도 나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 아닐까. 당장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누군가 죽어가는 데 무관심해도 되는 걸까. 나는 '구조적 부정의'를 목격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땅히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을 회피했던 게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때로 우리는 단지 무관심했던 것을 넘어 '구조적 부정의'를 낳은 공범이었다. 태안해병대캠프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람(가명)씨는 참사의 진짜 원인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복종 문화라고 지적한다. 목 밑까지 물이 차오르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관이 시키는 대로 바다로 더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
친구들이 실종된 상황에서도 '빨리 친구를 찾아내라'고 교관에게 따질 생각은 못 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자람씨는 참사 당시 그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가 교관들한테 복종하는 관계라서 아무것도 못한 것 같아요"라고 회상했다.
문제는 해병대캠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곳곳에서 억압과 복종이 만연해있다는 사실이다. 2016년 9월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죽나 거리에서 죽나 똑같으니 여기 있어라",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수능이 66일 남았는데 지진이 무슨 대수냐", "무단외출 시 벌점 부과하겠다"며 학교에서 계속 야간학습을 시켰다.
어떤 학교는 놀라서 교실에서 뛰쳐나온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고, 압수해둔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아 학생들이 가족과 지인의 안부를 확인할 기회마저 가로막은 학교도 있었다. 운 좋게도 참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학교들이 앞서 살펴본 참사 책임자들보다 나은 점이 뭘까.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안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기업과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무관심과 은밀한 공조 속에 참사를 낳는 사회구조는 오늘날까지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데리다 연구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책임을 '응답가능성'으로 번역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에는 말을 통한 호소와 응답의 관계가 있고, 호소를 들으면 응답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 안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영어로도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한다(respond to)는 뜻이 있다. 그래서 다카하시 데쓰야는 "인간은 원래 타자의 호소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 안에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52~55쪽).
그렇다면 재난 피해자들의 호소-이 끔찍한 참사에서 구해달라는 외침,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과 비애를 부르짖는 절규,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사회를 함께 만들자는 탄원에 '응답'해야 하는 사람은 정부공직자나 기업 임원만은 아닐 것이다. 재난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말에 '응답'해야 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재난을 묻다> 마지막 장을 덮고, 재난피해자들의 호소에 '응답'하는 서평을 쓰기 위해 컴퓨터 전원을 켰다.
재난을 묻다 - 반복된 참사 꺼내온 기억, 대한민국 재난연대기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서해문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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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2024.6~현재 진실의 힘 편집자.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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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피해자들 호소에 응답할 자,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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