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차별금지법에 꼭 들어가야 할 말, '빨갱이'

등록 2017.08.21 15:45수정 2017.08.2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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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9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지금부터 67년 전, 경남 마산 여양리 도둑골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루었다. 방송의 반향은 컸다. 방송 직후 '보도연맹'은, 포털사이트 다음의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올랐다. 그런 점에서 이날은 지난 70년 내내 '냉전'과 '식민'이 내리 짓눌러온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기억해둘 만한 순간이었다.

그동안 보도연맹에 대한 주류 매체의 보도나 다큐멘터리 방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날 방송 내용이 이토록 시청자들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국가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던 시민들이 67년 전 '한국판 킬링필드'의 실상과 그에 대한 '가해자들의 무관심, 무반성한 태도'를 시청하며 어떤 데자뷔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국가는 국민을 의심했고, 일제의 유산을 이어받아 전국민을 '일등국민'과 '이등국민'으로 나누어 차별적으로 관리했다. '이등국민' 중에는 일제 시기 항일해방투사들도 있었고, 무고한 민간인들도 있었다. '이승만판 블랙리스트'였다. 전쟁이 터지고, 1949년 이 땅에서 철수한 미군이 들어오자 미군의 힘만으로 자기 권력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한 지배자들은,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이등국민들을 가차없이 학살하기 시작했다. 보도연맹 학살을 포함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이런저런 까닭으로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의 수는 현재 전국적으로 1백 만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억울하게 부모, 동생, 자식, 친척 등을 떠나보낸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인데, 피학살자 유가족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국가에 의해 평생동안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연좌제였다. 피학살자 유가족들은 내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 형이 어떤 일로 죽었는지 등의 여부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동네 사람들도 그저 쉬쉬하기만 할 뿐이었고, 때로는 빨갱이 집안이라며 흉을 보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 역사상 최대의 끔찍한 비극인 '보도연맹 학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반세기 넘게 '없던 일'로 취급받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촛불항쟁 이전 국가권력과 이 땅 주류가 취한 태도는, 보도연맹 피학살자 유가족들 입장에선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런 일은 지난 반세기동안 상시적으로 겪어, 이제 더 이상은 말 조차도 꺼내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속에서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들은 이후 아무런 처벌이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반공'의 이름으로, '애국'의 이름으로 가해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이들의 '기억'은, '대한민국 주류 또는 보수세력의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반세기가 넘은 지금,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방송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기 위해 지금 우리는 몇 가지 방법을 실천해나가야 한다. 특히 촛불시민들의 열망이 모여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이를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첫째는, 철저한 조사를 통한 진상규명과 피학살자들의 명예회복일 것이다. 지난 참여정부 시기 국회에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법)이 통과되어 일부 진상규명을 시도하였지만, 이후 정권이 교체되면서 관련 조사는 사실상 중단되다시피 했고 원점으로 되돌아 갔다. 그리하여 지금 국회에는 다시 과거사법 개정안이 제출되어 있다.

'가해자'들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다 끝난 일"이라 강변하지만, 피해자(유가족)들 입장에선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아픔이자 고통'이다. 그런 만큼 전국적으로 피학살자 유해발굴 사업을 실시하고, 진상규명에 노력하며, 피학살자 유가족들에게 법적, 경제적 배상까지도 국가가 책임지는 노력이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둘째는, 최근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과제 가운데 '차별금지법' 재정은 빠지고 말았지만, 그것이 곧 차별금지법 제정 노력의 무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우리의 공론장에서, 일상에서 끊임없이 논의된다면, 정부 역시 이를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한국판 차별금지법'에는, 차별 금지의 대상으로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빨갱이'와 '종북'을 반드시 명시해야 한다. 즉, 우리 시민 누구나 '빨갱이', '종북'이라는 딱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빨갱이(종북)는 죽여도 좋다"라는 담론이 여전히 횡행하는 우리 사회 일각의 풍토를 보고 있으면, 그 시급성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독일에서 '반(反)나치법'이라는 법적 장치를 통해 나치 관련 언어, 상징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실 한국의 '빨갱이' '종북' 담론은 미국이나 유럽의 인종주의적 차별 담론과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발생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 시위는 지난 겨울 탄핵 국면에서 이른바 '친박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폭력성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을 주장한다면, 한국의 극우세력은 빨갱이, 종북에 대한 차별을 통해 지난 수십년 간 기득권을 누려왔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법적 장치가 '국가보안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회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문재인 정부로선 '국가보안법 폐기'는 부담스러운 과제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 당장 국가보안법 폐기가 어렵다면, 최소한 '차별금지법'을 통해서나마 '종북(빨갱이)몰이'를 막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두어야 할 것이다. '차이'와 '다름'은 그것을 존재하지 않는 일인 마냥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념적 양극화가 극심한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일은, '차이'와 '다름'을 현실의 문제로 인정하고, 각각의 '다름'이 '차별의 대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풍토를 조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이 '탈식민(脫植民) 과제'를 완수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식민지배란 '우열(優劣)'의 규정에 따른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배나 역대 극우독재정권의 지배는 모두 그런 담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 이래 이 땅에서 '빨갱이'는 열등한 존재였고,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였으며,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해도 억울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이명박근혜 정권은 '정권 비판자' 혹은 '정권에 의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좌파', '종북 빨갱이'로 몰아갔던 것이다.

이처럼 반세기 넘게 자신의 아픔을 하소연할 곳도 없이 지내며 침묵을 강요당했던 보도연맹 피학살자 유가족들의 존재는, 한국판 차별금지법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며 왜 시급히 제정되어야 하는지를 절절히 웅변하고 있다.
#보도연맹 #차별금지법 #탈식민 과제 #종북몰이 #그것이 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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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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