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친 거 아냐?" 성폭력 피해자는 이런 말을 들었다

[공모] 10년 전 경험한 그 일... 피해자를 향한 이상한 질문들

등록 2017.11.19 13:38수정 2017.11.2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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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꼬리 친 거 아니야?" 담당형사가 지나가듯 흘린 말에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pixabay


"먼저 꼬리 친 거 아니야?"

담당형사가 지나가듯 흘린 말에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XX, 얘 잘못이 아니라고!"

반대편에 마주 앉아 있던 형사에게 대거리했다. 형사의 질문은 계속 겉도는 것으로도 모자라 퉁명스럽기까지 했다. "먼저 꼬리 친 거 아냐?" 그 말 한마디에 입술이 부르튼 고등학생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형사의 말을 듣고, 고등학생이 우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던 가해자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너, 잠깐 좀 나와"

그렇게 형사는 가해자 대신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형사는 나의 욕지거리에 기분이 언짢았던 모양이었다. 2007년 1월 1일, 경찰서 풍경이 그러했다.

2006년 12월 31일, 한밤중에 고시원에서 짧은 비명이 울렸다. 서울의 한 고시원에서 총무일을 보다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잘못 들었나'하는 생각하곤, 미처 닦다 만 바닥에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릴 다시 듣게 됐다. 멈칫. 두 번째 비명은 첫 번째 소리보다 더 길게 이어졌다. 무언가를 뚫고 나온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은 집을 나온 여자 고등학생이 혼자 묵고 있는 호실 쪽이었다.

그 학생이 혼자 있어야 할 방엔 검은색 두꺼운 누비옷을 입은 남성이 서 있었다. 남성은 다른 호실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는 청년이었다. 가해자는 눈이 마주치자 날 강하게 밀치고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엔 학생이 누워 있었다.

불어터진 입술,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카락. 평소 내가 기억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학생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 듣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성폭력'

"네가 잘못해서..." 성폭력 피해자를 옥죄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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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를 옥죄는 그 말들. ⓒ PIXABAY


도망쳤던 가해자를 몸싸움 끝에 붙잡았다. 경찰차 안에서부터 가해자는 "술 먹고 한 실수"라고 경찰관에게 강조했다. 3층에 살던 가해자는 술김에 방을 착각해 2층 학생 방으로 잘못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사건 담당형사를 만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가해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바로 옆에서 울고 있는 학생을 오히려 나무랐다.

가해자는 "혼자 사는 소녀가 왜 평소에 문을 잠그지 않고 자?"라며 고시원 사람 모두가 그녀가 방문을 잠그지 않고 자는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술을 마셔서 그랬다고, 가출한 학생이 방문을 잠그지 않고 부주의했다고, 평소 고시원 사람에게 끼를 부렸다고, 행실이 올바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는 가해자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법대로 하자고 했다.  

"여자가 조심했었어야지."

가해자의 진술이 끝나고, 피해자 앞에 앉은 형사가 학생에게 말했다. 문을 잘 잠그고 잤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왜 조심하지 않았냐고 나무랐다. 형사의 말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가해자와 똑같은 말을 하는 형사가 무심코 던진 말을 반박했다.

"방문을 안 잠그고 자면, 성폭력 해도 됩니까?"

형사에게, 가해자에게 따져 물었다. 경찰서에서 반성은커녕 술김에 그랬다는 가해자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다. 피해 학생은 이 과정을 지켜보며 울음을 그치고 시작하기를 반복했다. 피해 학생은 가해자의 뻔뻔한 태도와 경찰의 무례한 질문 사이에 놓였다. 2차 폭력이었다.

"너 같은 X은 더 당해도 싸."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사이 아침이 밝았다. 학생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경찰서에 왔는데, 그녀가 오자마자 내뱉은 말이 귓가를 때렸다. 졸음을 깨게 했다. 어머니라는 사람은 학생의 머리를 연신 쥐어박고 상처가 난 몸 이곳저곳을 꼬집기만 했다. 욕지거리도 함께였다. 자신의 딸에게 "괜찮냐"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위로와 격려의 말을 기대했던 건 사치였다. 그 어머니는 "동네망신"이라고 한탄했다.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다 될 즈음 피해 학생은 경찰서를 나섰다. 하지만 그녀가 향한 곳은 결국 집이 아니라 고시원이었다. "집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나의 물음에 학생의 아버지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학생의 오빠는 어머니의 잔소리와 간섭으로 학생이 가출을 했었다고, 이번 가출 전까지 총 6번이나 집을 나왔었다는 사실을 일러줬다.

어떻게 학생이 방치됐는지를 가족들에게 듣는 사이, 그 어머니는 학생이 가출하기 전 어떻게 살았는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든 사람들이 다 듣기를 바라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고시원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학생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언어폭력이 이어졌다.

소리를 들었는지 고시원 다른 방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피해 학생이 간밤에 겪게 된 일들을 알게 됐다. 학생의 아버지와 오빠는 아무 말 없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덕담이 오가야할 새해 첫날 고시원의 모습이 그러했다.

오늘도 세상은 묻는다

"네 잘못이 아냐."

사건이 일어난 그 순간, 경찰서 안에서, 그리고 가족이 피해 학생에게 언어폭력을 저지를 때 했던 말이다. 성폭력을 당하고도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피해 장소로 돌아와야만 했던 아이에게 "정말 네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에게, 사회적 약자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이 사회 구조가 잘못됐음을 강조했다.

세상은 성폭력 사건의 원인을 가해자인 남성이 아닌 '여자'에게서 찾는다. 여자가 평소에 품행이 방정맞아서, 그래서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자가 성폭력을 당하게 된다고 그것이 원인이라고 말한다. 몹쓸 짓을 저지른 이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비난의 화살은 피해 여성에게로만 향한다.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 순간에, 무례하고 부주의한 질문만이 공간을 채울 뿐이다.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2017년에 서서 2007년 그 순간을 기억해 본다. 지금은 성인이 됐을 학생을 떠올려본다. 이제는 흐릿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그때의 기억이 도드라지고 선명해진다. 사건의 목격자였던 나도 이런데 당사자였던 아이는 어떠할까. 그동안 어떠했을까

오늘도 세상은 여성에게 묻는다. 성폭력에 당한 여성들에게 "여자가 잘못한 것 아니냐"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다. 10년 전에도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말해주고 싶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성에게 잘못된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야. 정말 여자들의 잘못이 아니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창비·오마이뉴스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공모 기사입니다. (공모 관련 링크 : https://goo.gl/9xo4zm)
#네 잘못이 아냐 #성폭력_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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