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동 인민대회장소 봉기군과 지방좌익은 1948년10월 20일 오후 3시경 중앙동 로터리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인민대회를 열었다. 여기에서인민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6개항의 결정서를 채택하였다.1.인민위원회의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5.친일파,민족반역자 등을 철처히 소탕한다.6.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신민구
'동포학살을 거부한다'와 '미군 즉시 철수' 주장은 여순항쟁의 발발원인이었다. 군대에 의한 여순항쟁에 정부와 군대는 책임 전가를 위해서 여수 봉기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신망이 높았던 송욱 교장을 지목했다. 나중에는 이승만이 정적 제거를 위해서 최초의 조작사건인 '혁명의용군 사건'을 만들어서 여순항쟁을 주도한 조직으로 엮는다.
여순항쟁은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김지회 사령관을 중심으로 군인이 봉기하고 여기에 민중들이 호응하여 일어난 항쟁이다. 대략 인명 피해가 1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넓게는 1948년 10월 19일부터 시작된 여순항쟁은 군경 토벌작전이 진행된 1950년 5월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37개 시·군 지역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종산국민학교 군경이 주둔하면 10월28일부터는 여수와인근 읍면 지역에서 끌려온 혐의자를 팬티만 입힌 채 10명씩 포승줄로 묶어 12월 중순까지 수용하였다. 부산 5연대장이었던 김종원은 혐의자를 재판없이 즉결처분을 자행하였는데, 권총이나 일본도로 목을 치는 광란적인 학살만행을 자행하였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김종원은 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하였다.
신민구
여기에 가담한 군인들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입산하여 항쟁을 이어갔다. 산을 근거지로 항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밤에 인근 마을에 내려가서 저녁 등을 해결하였다. 그러면 다음 날 군경이 와서 저녁을 해주고 협조하였다고 무고하게 주민들을 학살하기를 이어갔다.

▲만성리형제묘 만성리학살지와함께 알려진 이 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을 붙인 곳이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125명이 총살되고 불태워 졌다. 묘비의 설명은 지워져서 지금은 아무 글씨도 없다.
신민구
이때 천석지기 딸인 19살 백순례가 대를 잇기 위해서 오빠를 대신해서 죽으러 가면서 불렀다는 <산동애가>가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산동면을 포함해서 산마을 그리고 전남 동부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산동애가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 보지 못한 채로
화엄사 종소리에 병든 다리 절며 절며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열아홉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야 간다
여순항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민중들을 탄압하는 시발적인 항쟁이다. 특히 전라남도 동부지역은 여순항쟁의 영향이 아직도 크다.
14연대가 출동을 거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민 3만 명이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우리 군대가 국토방위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지켰다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때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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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몸담으면서 교사.교육활동은 현장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도 변혁이 되어야만 참교육에 이른다고 봅니다.그래서 짧은 소견을 대중적인 전자공간을 담보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합니다. 저서로 [자본론노트],[청소년을위한백두선생경제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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