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31 19:45최종 업데이트 18.01.04 14:29
2008년 2월 말, 우리는 용두동의 오래된 여관 2층 방에 마주 앉았다.

"예전에 수사할 때 가끔 빌려 쓰던 곳인데..."


그는 경찰서가 아닌 여관에서 수사를 했다고 한다. 경찰서에서 수사하지 못할 수사. 동료경찰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수사. 방을 둘러보며 나는 이곳에서 또 어떤 억울한 조작의 피해가 만들어졌을까 궁금해졌다.

2008년 이근안을 만난 용두동 소재 동아장 여관 ⓒ 변상철



"건강은 어떠세요?"

진심어린 걱정의 마음을 담으려고 노력하며 질문했다.

"몸이 말이 아닙니다. 당뇨를 앓고 있는데 합병증으로 고혈압, 심부전증을 앓고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바지를 걷어 자신의 다리를 보여주었다.

"봐요. 이렇게 다리가 부었잖소. 이래서 내가 다른 데 못가고 집 근처에서 다리를 편안히 뻗을 수 있는 곳으로 오자고 한 겁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최대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가능한 조사를 빨리 끝내자는 암묵적 시위다.

"내가 수감된 뒤 마누라가 미용실을 경영하면서 생활했는데, 그나마 내가 고문했다는 소문이 퍼지니까 미용실도 운영이 어려워져서 문을 닫고 요즘 박스나 폐지를 주워서 생활하고 있어요. 내가 출소한 후에는 같이 박스를 주웠는데 얼마 전에 마누라가 빙판길에 넘어져 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마저도 어려워졌어요. 기가 막힙니다."

그에게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이 사회는 너무 불공평해 보이나 보다.

이근안이 머물렀던 용두동 자택 ⓒ 변상철


"나야말로 애국한 죄밖에 없는데... 박처원 단장(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이 그 사건에서 날 부르지만 않았어도...."

그는 김근태 사건을 회상했다.

"1985년 3월인가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으로 발령받아 근무를 하고 있는데 김근태 사건이 터졌죠. 하루는 박처원 단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김근태의 친인척 중 월북자 8명, 부역자 10여 명이 있다. 정권타도를 위해 북과 연계되어 있는 것 같은데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1차 안기부에서 수사를 했는데 풀지 못해 치안본부로 넘어왔다. 어려운 사건이니까 네가 올라와서 사건을 좀 맡아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올라와서 사건을 맡게 된 거죠."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한마디 거들었다.

"김근태 사건으로 인생의 전환점이 생기셨어요."

1999년 1월 구속이 결정된 이근안 전 경감이 성동구치소로 이송되기 전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이보쇼, 조사관. 대공수사단 인원 중 무술 유단자가 수십 명이요. 솔직히 사람 팰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겠소. 사람 잘 조사한다고 소문이 나니까 내가 올라가서 독박 쓴 거지."

더 이상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조사하려던 사건은 입도 떼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1984년 제주도 이장형 사건 때문입니다."
"이장형, 이장형, 이장형이라... 아, 제주도 이장형. 내가 그 사건 실황조사서 잘 썼다고 격려금도 30만 원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소설 잘 썼다고 받은 격려금이라니 기가 막혔다.

"두 달여 정도를 불법감금하고 수사하셨던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자꾸 불법감금, 불법감금 하는데 간첩이 어디 뚝딱 자백한답니까. 그리고 일본 간첩들은 대일조회자료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아, 그리고 간첩사건 우리 맘대로 합니까? 안기부에서 조정 지시가 떨어지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요구 하는 게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데 이제 와서 불법감금이라니, 나 원. 규정대로 움직이면 간첩들 전부 공작 끝내고 평양으로 내빼고 마는데 그걸 뻔히 보고 있으라는 거요?"

고문과 조작에는 개인이 아닌 국가시스템 전체가 움직인다. 당연하겠지.

"여기 오기 전에 동료 수사관 조사를 마치고 왔습니다. 동료 수사관들이 말하길 '양심봉'이란 몽둥이로 피의자들을 구타하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주도했다고 하던데요?"

말이 끝나자 그의 얼굴 근육이 씰룩거렸다. 아마도 이 세상 어떤 말보다도 더 저주스런 말을 퍼붓고 싶은 모양이었다.

"의리도 없는 놈들. 아직도 나한테 뒤집어씌우는군. 수사단에 각목이 있다고? 천만의 말씀. 난 생리적으로 각목을 쓰지 않소. 화가 나면 손이나 발로 때리지 각목 건 같은 안 쓴단 말이요."

한바탕 내뱉고 난 뒤,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같이 고문하고도 나 혼자 10년을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다 7년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소. 그때 그놈들 죄까지 내가 다 짊어지고 들어갔는데 아직도 내 책임이라고... 쳇! 나쁜 놈들."

그는 분노했다.

1993년 2월 16일 이장형의 석방을 위한 기사 ⓒ 변상철


"내가 이장형을 좀 괴롭히긴 했지만 고문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루는 이장형이가 자기 딸이 '백반증'이 있는데 그걸 고치려고 일본에 갔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딸자식 위한 마음이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똑같은 것 아닙니까?"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고문기술자로부터 부정(父情)의 감정을 듣게 되니 가증스럽기만 하다.

"이 사건으로 이장형이 무기징역 형을 선고 받았어요. 수십 년의 감옥살이로 본인은 물론 가족들 역시 제주를 떠나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겪었어요. 어떠세요?"

그는 태연했다.

"경찰에서 조사하면 기소는 검찰 몫인데 왜 우리가 잘못된 수사관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겁니까? 검사가 기소만 하면 우리에게 포상금이 나오면 끝이란 말입니다.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나오든 그건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요."

'애초 당신 같은 사람들이 사건을 엮어 만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어!'라는 말이 목까지 넘어왔다. 감정을 누르고 다시 질문했다.

"그래도 역시 당시 수사가 무리했던 것으로 보이는 데 대한 책임은 없습니까?"

그는 이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려고 이 과거사위원회 만든 거 아니요? 그 판단도 위원회에서 할 몫이지 내가 판단할 몫은 아닌 것 같은데? 흐흐. 자 다 끝났으면 어디 가서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의 정신력은 그야말로 '갑'이다.

"내가 당뇨가 있어서 짜고 맵고 이런 거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되는데. 어디 생선요리나 먹으러 갑시다."

그의 말대로 몸이 좋지 않은 그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생선요리를 주문했다. 생선의 종류를 직접 고르고, 최대한 짜고 맵지 않게 부탁했다.

"제주에 출장 갔을 때 생선요리 많이 드셨겠어요."
"그때야 출장비 넉넉히 나올 때니까요. 그리고 가면 여기저기서 서로 돈을 내겠다고 해서."
"그거야 서슬파란 대공수사관이라고 하니까 무서워서라도 돈 내겠다고 했겠죠."
"애국자들이죠. 대공수사 힘들다고 격려도 해주고."

기가 막혔다. 뭐든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는 이 사람들.

함께 식사했던 용두동 식당 ⓒ 변상철


"요즘 애도 취업을 못하고 건강이 안 좋아요. 나 하나 고생하는 건 괜찮은데 마누라랑 자식들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 뒤로 목회자의 길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의해 고문기술자, 악마, 고문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이 자도 자식과 부인을 걱정한다. 그는 이제라도 그의 손에 파괴되었던 많은 가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백반증을 앓고 있는 딸아이를 위해 불법밀항을 감행했던 약점 때문에 간첩으로 고통당해야 했던 이장형과 그의 가족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소위 우리 사회에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지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있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수준을 벗어나 편향된 상태를 보이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자신의 가치만이 애국이고, 그 가치를 폭력적 방법으로 구현하여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질서를 흔드는 고문 수사관 역시 이 범주에 든다.

그리고 나는 이날 사이코패스라고 여겼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는 그와 밥을 나눴다. 그와 밥을 나누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진심으로 신의 긍휼하심이 그 밥상에 머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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