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잘 본 며느리가 끓인 떡국

"미역이요? 그거 떡 아니에요?"

등록 2017.12.29 13:35수정 2017.12.2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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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표 택배상자가 오랜만에 도착했다. 슬슬 보낼 때가 됐을 거란 촉이 오더니만. 냉동실도 어느새 헐렁해져서 뭔가 채워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지.


a  시어머니표 택배 상자, 꺼내기 전까진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다.

시어머니표 택배 상자, 꺼내기 전까진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다. ⓒ 조혜원


언제나 그렇듯 종합 구호식품 그득한 상자를 연다. 커다란 떡국 봉지부터 온갖 떡, 참기름에 잰 김, 마른멸치, 마른 조갯살에 사탕과 치즈까지. 마른 조갯살은 처음 보는지라 신기하기만 하고, 한 봉지가 아닌 달랑 다섯 개 싼 치즈를 보니 아마도 누가 먹으라고 준 걸 아꼈다 보내신 듯. 그냥 좀 드시면 좋으련만….

어머나, 생선 뼈까지 챙기셨네? 우리 집 강아지 간만에 입 호강, 마음 호강하겠다. 저 멀리서 어머니가 마음 쓰고 있는 걸 너도 느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참, 구호식품 잘 받았다고 전화부터 드려야지. 전화 오길 기다리셨는지 연결되자마자 이것저것 썰을 푸시는 어머니.  

a 시어머니 정성 가득한 구호식품 떡국을 비롯한 온갖 떡, 참기름에 잰 김, 마른멸치, 마른 조갯살에 사탕과 치즈까지. 한 봉지가 아닌, 달랑 다섯 개 싼 치즈를 보니 아마도 누가 먹으라고 준 걸 아꼈다 보내신 듯.

시어머니 정성 가득한 구호식품 떡국을 비롯한 온갖 떡, 참기름에 잰 김, 마른멸치, 마른 조갯살에 사탕과 치즈까지. 한 봉지가 아닌, 달랑 다섯 개 싼 치즈를 보니 아마도 누가 먹으라고 준 걸 아꼈다 보내신 듯. ⓒ 조혜원


"택배 보내러 갔더니 거기 아줌마가 또 오셨네요, 오실 때 됐다 싶었어요, 하더라."

내 마음이랑 딱 통한 그 아주머니 말씀에 어머니 듣는 줄도 모르고 주책없이 깔깔 웃었다. 늘 가신다는 싼(?) 택배집이다 보니 서로 낯을 익히셨나 보다. 가까운 우체국 놔두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먼 길 택배상자 끌고 가셨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말릴 방법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

"그 아줌마가 아들 거냐 딸 거냐 묻더라. 아들이라고 했더니 며느리가 그런 거 받느냐고 하기에 우리 며느리는 잘 받는다고 그랬지. 그랬더니 며느리 잘 보셨네요, 하네. 자기 경험으론 안 받는 며느리는 끝까지 안 받는다고 하면서."


예까지 숨 안 돌리고 이야기하시더니 뭐가 그리 신나는지 전화기 너머로 깔깔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도 덩달아 웃는다.

"저야 좋으니까 잘 받죠. 어머니 덕분에 떡도 받고 칭찬까지 받으니 영 부끄러운데요."


"사실인데 뭘 그러냐. 내가 우리 며느리 착하다고 자랑했다. 잘만 먹어라. 떡국 잘 끓여먹고 조갯살은 볶아 먹으면 맛있단다. 넌 고긴 못 먹어도 해물은 먹으니까 보냈지. 참! 미역은 녹여서 먹으면 된다."

"네? 미역이요? 없던데요?"

"작은 봉지에 검정색 두 개 있어."

"아, 그거요? 떡 아니에요?"

"미역 불린 거 기름에 들들 볶아 얼린 거야.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해놓고 한번씩 나도 해먹는다. 맛있어."

"전에 생미역 주신 것도 잔뜩 있는데…. 네, 잘 먹겠습니다!"

a 검은 떡이 아니라 검은 미역  떡인 줄 알고 다른 떡이랑 같이 넣었던 검정색 물체(?)는 미역이었다. 아는 길 물어가라더니 아는 택배도 물어서 보관해야 할 듯.

검은 떡이 아니라 검은 미역 떡인 줄 알고 다른 떡이랑 같이 넣었던 검정색 물체(?)는 미역이었다. 아는 길 물어가라더니 아는 택배도 물어서 보관해야 할 듯. ⓒ 조혜원


참기름 한 방울만 떨어져 있어도 그 미역국 느끼해서 한 입도 못 댄다는 말이 튀어나오려던 걸 꾹 눌렀다. 전화 끊자마자 냉동실로 직행! 다른 떡이랑 같은 봉지에 넣은 검정 물체를 꺼냈다.

검은 쌀 떡쯤 되겠지 여겼던 이것이 미역이라니, 겉만 봐선 도저히 모르겠네. 곁따라 나온 얼린 오징어까지 보니 어쨌든 이 봉지가 떡이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하마터면 떡에 비린내 밸 뻔했네. 휴, 먼저 알려주셔서 다행이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더니 아는 택배도 물어서 보관해야겠네.

오늘 저녁은 시어머니표 떡국. 멸치 다시마 우린 물로만 끓여도 뽀얀 국물과 쫄깃한 떡이 오메, 맛나다. 앞에 앉은 남자가 두 그릇이나 비우니 떡국 만든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팍 생기네.

"이야, 잘 먹네! 맛있나 봐! 어떡하지? 나, 아무래도, 떡국 잘 끓이는 사람이 됐나 봐."

"나 원래 떡국 좋아해. 떡만둣국이면 더 좋고."

"피이. 입으로 천냥 좀 벌지 않구선, 김새게."

a 시어머니 사랑과 고생이 담긴 떡국  시어머니표 떡국. 멸치 다시마 우린 물로만 끓여도 뽀얀 국물과 쫄깃한 떡이 오메, 맛나다.

시어머니 사랑과 고생이 담긴 떡국 시어머니표 떡국. 멸치 다시마 우린 물로만 끓여도 뽀얀 국물과 쫄깃한 떡이 오메, 맛나다. ⓒ 조혜원


생각해 보니 좀 미안하긴 하네. 이 남자가 만두 깨나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만두 넣으면 기름기랑 고기 맛 우러난다고 내가 떡만둣국은 절대 안 끓이니까. 가게에 파는 만두도 고기 냄새가 많이 나서 아예 먹지도 사지도 않으니 안 됐긴 했지. 그래, 고기 못 먹는 여자랑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게야.

고기 맘 놓고 못 먹는 안쓰러운 남자를 낳아주신, 시어머니의 사랑과 고생이 담긴 떡국. 올겨울 첫 떡국을 새해가 오기 전부터 잘 먹었으니 나잇살 하나 더 먹은 셈치고 다짐 두 가지 해본다.

하나, 다음 장에 갈 땐 만두를 사자. 두울, 다음 떡국엔 만두를 넣자. 왠지 그러면 받을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이 죄송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것 같은 느낌이…. 

a  산산이 깨진 그릇 따라 조각 날 뻔했던 내 마음. 어머니 택배 덕분에 차곡차곡 꿰매진 기분이다.

산산이 깨진 그릇 따라 조각 날 뻔했던 내 마음. 어머니 택배 덕분에 차곡차곡 꿰매진 기분이다. ⓒ 조혜원


어제 설거지하다 아끼는 그릇 하나를 깼다. 이 덜렁이, 없는 살림살이 또 축냈다고 혼자 주눅 들었건만 먹을거리 살림 가득 생기려고 그랬나 보다. 산산이 깨진 그릇 따라 가늘게 금이 갈 뻔했던 내 마음. 어머니 덕분에 차곡차곡 꿰매진 기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가 며느리 잘 보신 게 아니라, 내가 시어머니를 잘 본 듯. 그것도 아주 많이!        
#시어머니 #며느리 #택배 #떡국 #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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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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