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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차 배우의 '드라마 현장' 고발, 하나도 버릴 게 없다

[하성태의 사이드뷰] '제2의 <화유기> 사건' 막으려면 배우 허정도의 말에 귀기울여야

18.01.08 17:05최종업데이트18.01.0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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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제작 인력 안전 강화 및 인권 보호
▲ 근로 환경 개선
▲ 합리적인 외주 제작비 산정 및 저작권 배분
▲ 외주 제작 공정 거래 환경 조성
▲ 방송 분야 표준 계약서 제개정 및 활용 확대


실로 오래 걸렸다. 납득할 만한 방송 외주제작사에 대한 실태와 대책이 수립된 것 말이다. 지난달 19일, 방송통신위원회, 문체부, 과기정통부, 고용부, 공정위 등 5개 부처는 합동으로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위는 그 대책의 주요 내용이다.

5개 부처는 소위 '생방송 촬영'으로 불리는 살인적 촬영 일정 등 외주제작 시장의 열악한 근로환경이 부족한 제작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한편 이를 개선하기 위해 외주제작사를 근로감독 대상에 포함, 최저임금·임금체불·장시간 근로 등을 집중 점검하기로 했다. 

방송사 재허가 조건에 이러한 불합리한 외주제작 관행의 개선을 반영시키기로 한 것은 특히 주목된다. 외주 제작 인력의 상해, 여행자 보험 가입 확인 여부 등을 방송 평가에 신설, 방송 제작 인력 안전 강화를 위한 대책 수립 여부와 외주 제작비 산정 및 저작권 배분을 위한 방송사별 자체제작 단가 제출을 재허가 조건으로 부과하기로 했다.

또 5개 부처는 외주 제작의 공정한 거래 환경 조성을 위해 저작권 등이 합리적으로 배분되도록 외주제작 가이드라인을 마련키로 했다. 이를 위해 방송사의 외주제작사에 대한 불합리한 협찬 배분, 저작권 양도 강요, 계약서 작성 거부 등을 금지하는 내용의 방송법 개정도 추진된다. 아울러 영화계에 이미 정착되고 있는 표준계약서 역시 방송 분야 표준 하도급 계약서 개정을 통해 확대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이효성 방통위원장은 "이번 개선 대책을 91년 외주제작 의무 편성 제도 이후 지속 돼 온 외주제작 시장의 고질적인 불공정 관행을 바로 잡는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라며 "이를 통해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 공정하고 상생하는 환경을 조성해 방송 제작 시장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업계 반응은 어떨까. 

'방송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과 방송가 '을'의 목소리

▲ '화유기' 추락 사고, 현장 동료 증언 4일 오후 서울 태평로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드라마 '화유기' 제작 현장 추락 사고 대책 수립 촉구 기자회견>에서 사고 당시 현장 동료였던 노동자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 이정민




'을'에 해당하는 독립 PD들은 이 같은 정부의 종합대책 발표를 환영하고 나섰다. 지난달 21일 한국독립PD협회는 'MBC 외주관행 개혁 촉구 및 방송 외주제작 불공정 관행 개선 종합 대책 시행 촉구'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정부의 이 같은 대책이 실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각 방송사의 외주제작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이하 드라마제작사협회)도 목소리를 냈다. 지난 5일 성명을 낸 드라마제작사협회는 "문화계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와 같은 대책 수립 발표는 있었으나 실 진행 과정에 있어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외주제작사들에도 큰 도움이 못되었다"며 "상생협의체를 통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의 실질적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드라마제작사협회는 "이번 기회에 방송사-외주사 간의 불공정 관행에 대한 성역 없는 실태조사가 이루어져 불공정 관행이 해소되길 바란다"며 "(이번 종합 대책이) 외주제작시장 기대에 부응하는 실효성 있는 결론을 도출하기를 바라며, 관련 법 개정 등을 위해 정부부처와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주제작사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드라마를 제작하며 국격을 높여 온 한류의 주역이며, 지금도 글로벌 문화시장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땀 흘리며 일하고 있다. 그런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 작금의 사태는 너무 슬픈 현실이며 지양되어야 한다."

드라마제작사협회 측은 지양돼야 할 슬픈 현실이라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 작금의 사태"라고 꼬집었다. 문제는 재주를 부리는 곰이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종합대책 발표를 두고 늦었지만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시기만 놓고 보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만큼 외주제작을 둘러싼 불공정하고 열악한 환경이 악화일로를 거듭해왔다는데 이견을 제기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제작사협회의 이번 "상생협의체를 통한 대책위원회 구성" 주장 역시 금번 tvN <화유기> 미술 노동자의 추락 사고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비롯됐다는 시선이 적지 않다. 지난달 23일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화유기> 세트장에서 MBC아트 소속 스태프가 작업 중 낙상사고를 당했고, 허리뼈와 골반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사태가 확산되면서 같은 달 28일 고용노동부기 현장 실태조사에 나섰고, 피해 스태프의 가족은 방송사인 CJ E&M과 제작사 JS픽쳐스, 미술감독 등을 경찰에 고소했다. tvN은 지난달 24일 '역대급' 방송사고를 낸 <화유기>의 편성을 2주 미뤄, 6일과 7일 3회와 4회를 방영했다.

정부의 종합대책 역시 지난해 7월 EBS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사망한 故 박환성·김광일 독립PD의 안타까운 사고에 대한 사후 대책으로 마련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두 피디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장시간 현지 안내원의 조력 없이 촬영을 강행했고, 숙소로 복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 같은 배경엔 열악한 제작비와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의 갑을 관계가 작용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수많은 독립PD들이 목소리를 냈고, EBS는 물론 각 방송사에 대해 근본적인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지난달 21일 한국독립PD협회는 협회 회원 200여 명의 실명이 담긴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배우가 용기를 내어 드라마 현장에서 느낀 문제점과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사안들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배우 허정도의 진심 어린 충언 

배우 허정도의 블로그. ⓒ 블로그 캡처




"그런데 정부 발표('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_기자 주)가 있고 나흘이 지난 12월 23일, 한 드라마 세트장에서 작업하던 스태프가 구조물에서 떨어져 하반신 마비라는 끔찍한 부상을 당합니다. 그는 올해 각각 중2와 고3이 되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연말이면 늘 있는 방송사들의 연기대상 시상식을 보는 제 마음은 그리 편치가 않았습니다.

'배우들에겐 수십 개의 상을 만들어 노고를 치하하면서 왜 함께 고생한 스태프들은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걸까. 그동안 스태프들이 과로로 교통사고로 화재로 죽고 심지어는 모욕감과 자괴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에도, 우리는 왜 단 한 번도 잔치를 멈추고, 아니 잔치 도중에라도 함께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했을까. 만약 배우가 죽거나 하반신 마비가 됐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과 같았을까.'

저는 컴퓨터를 켜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 현장에 발 딛고 있는 한 구성원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그 목소리를 누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이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엄두가 안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이 글을 밖으로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12년차 배우 허정도가 지난 5일 자신의 블로그에 "만드는 이들도 행복한 드라마를 꿈꾸며"란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허정도는 연극과 영화로 활발하게 활동했고,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 W > <솔로몬의 위증> <역적> 등에 출연한 바 있다. 그는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현장에서 괴물로 보이던 사람이 밖에서 만나면 그렇게 호인일 수가 없는 경우를 여러 번 봤으니까요. 결국, 그토록 비인간적인 노동환경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 허정도는 "드라마 현장에서 느낀 문제점들 중 시급한 것들을 추려봤습니다"라며 다음 사안을 꼽았다. '표준계약서 전면 의무화'와 '휴식시간'과 '모호한 표현들'을 포함한 '기존 표준계약서의 개정', '미성년자 보호대책 수립' 등이 그것이다. 글을 맺으며 허정도는 한국 드라마/방송사의 현실적 문제점을 직시하는 한편 "힘없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울타리"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가 바라는 모든 변화에는 비용이 들고 누군가의 몫이 커지면 다른 누군가의 몫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드라마는 작품의 첫 틀을 짤 때,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의 몫을 먼저 정하고 그 나머지를 힘의 순위에 따라 나누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방식에서 벗어나 가장 힘 없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울타리를 먼저 만든 다음, 그 나머지를 힘 있고 기여도가 큰 사람들이 나누는 것. 그것이 드라마 현장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대한민국을 꿈꾸는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할 방향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도 해봅니다."

방송가 안팎 안타까운 사고와 죽음의 연쇄, 이제는 끝내자

▲ 언론노조 김환균 위원장, '화유기' 현장 추락 사고 대책 수립 촉구! 언론노조 김환균 위원장이 4일 오후 서울 태평로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드라마 '화유기' 제작 현장 추락 사고 대책 수립 촉구 기자회견>에서 대착 수립 요구안을 발표하고 있다. ⓒ 이정민




tvN은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복안을 놨다. 새로운 PD를 투입하고, 컴퓨터그래픽을 작업할 업체를 늘릴 것이며, 스태프들의 휴식을 최소 주 1일 보장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그리고 정상 방송된 <화유기>는 지난 주말 5%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태의 후속 조치에 대한 보도는 사라지고 시청률과 방송 내용과 관련한 기사들이 쏟아졌다. 이대로라면, 이번 <화유기> 사건은 거대 방송국이 만든 성공한 드라마의 '빛과 그림자' 정도로 일단락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16년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고 (故) 이한빛 PD의 죽음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tvN이었다. 다른 방송사라고 다를까. '생방송 스케줄', 방송사와 외주 제작사의 갑을 관계,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는 모두 '슈퍼갑'이라 불리던 지상파가 관철시켜 온 관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언론노조가 "이 문제가 방송제작 현장의 문화를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범정부차원의, 드라마 제작 현장에 대한 긴급 전수조사를 요청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배우 허정도의 충언을 되새길 때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현장에서 만들어진 드라마, 콘텐츠들은 과감히 '퇴출'을 요구하고, '불매'를 해야 할 때다. 그렇게 만들어진 드라마가 '한류' 드라마로 포장되고 큰 수익을 내며 국내외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들 무엇하겠는가.

한쪽에선 스태프들과 제작진이 사고사로 목숨을 잃고, 하반신 마비 환자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정부가 내놓은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이 내실 있게 실행되기를, 그리하여 방송가와 콘텐츠 산업의 전반적인 환경 개선이 이뤄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에 앞서, '슈퍼갑' 방송사의 자정과 변화 노력이 전제가 돼야 하겠지만 말이다.

화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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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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