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또는 글을 중심에 놓고 세상 이야기를 합니다. 그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기원[역사성]과 전도(뒤바뀜) 같은 것을 다룰 예정입니다. - 기자말
아래 시는 시조 시인 조운이 쓴 〈×月 ×日〉이다. 흔히 초장 첫 구절을 따 '언 눈 밟히는 소리'로 알려진 시다.
언 눈 밟히는 소리
좋아라고 딛는 듯이
고개를 수구리고
빠스각 빠스스각
들 밖에 다 나와서야
도로 돌쳐 걸었다.
조운은 1900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주현(曺柱鉉)이고 운(雲)은 아호인데, 1940년 '운'으로 개명한다. 그는 1921년 동아일보 4월 5일자 독자문단에 자유시 <불살라주오>를 발표하면서 자유시를 쓰기 시작하고, 그 뒤 1927년까지 43편을 발표한다.
1925년 <조선문단> 8호에 <법성포 12경>을 발표하면서 시조를 쓰기 시작한다. 1927년까지는 자유시와 시조를 같이 쓰다가 그 뒤부터는 주로 시조만 쓴다. 그리고 1949년 식구들과 같이 월북을 한다. 1988년 납·월북 문인이 해금된 뒤 비로소 연구가 되고, 1990년 광주 남풍출판사에서 <조운문학전집>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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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 조운기념사업회, <조운시조집>, 작가, 2002. ⓒ 작가
겨울밤 눈이 쌓이고 그 뒷날 살짝 녹고 난 뒤 밤새 다시 얼었을 때 아침 일찍 들에 나가 언 눈을 밝는다. 이때 소리는 빠드득 빠드득 하는 소리가 아니고, 정말 "빠스각 빠스스각" 하는 소리가 난다. 언 눈이 부서지면서 나는 소리다. 그는 이 소리가 재미있어 들 밖에 나왔다가 다시 돌아(돌쳐) 언 눈을 밟는다.
1975년 한수산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단편소설 <年末의 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윤이와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언 눈이 밟히는 소리만이 뽀드득거렸다."
한수산은 언 눈 밟히는 소리를 "뽀드득거렸다"고 쓰지만 역시 언 눈은 부서지는 소리가 나야 제격이다. 언 눈 밟히는 소리를 조운처럼 살아있게 쓴 것을 이 시 말고는 다른 시나 소설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조운이 쓰는 시늉말은 아주 적절하다. 언 눈 밟는 소리 '빠스각 빠스스각', 이 소리만큼 더 적당한 말은 찾기 힘들 것 같다.
"컴컴한 하늘에서 / 쑥쑥 빠지는 사비약눈"
'×月 ×日(컴컴한 하늘)'의 초장이다. '사비약눈'은 한 잎 두 잎 살살살(사비사비) 내리는 '첫눈'을 말한다. 그런데 이 눈이 컴컴한 밤에 떨어진다. 가로등 아래에서 보면 이 눈은 마치 밤하늘에서 어린 아이 이가 '빠지듯' 쑤욱 쑤욱 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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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완영(1919∼2016) 시인이 2011년에 펴낸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문학동네)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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