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달력 부분 한글날을 10월 중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여겨 모티프 삼은 것이다.
서부원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지워진다'사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낸 건 나지만, 디자인과 편집 등 컴퓨터를 이용한 대부분의 작업은 고2인 민수(가명)가 도맡았다. 그는 장래 프로그래머를 꿈꾸는, 자타 공인 교내 최고의 컴퓨터 달인이다. 더욱이 예술적 감수성까지 남달라 컴퓨터 앞에 앉으면 흡사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듯했다. 아무튼 그가 아니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백년하청이었을 것이다.
잠시 휴가를 다녀온 기간을 제외하면, 기획 단계부터 편집까지 겨울방학을 온통 이 프로젝트에 쏟아 부었다. 민수도 매일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와서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수차례의 수정 끝에 완성한 날, 그는 지금껏 해본 컴퓨터 작업 중 가장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었다면서 스스로 대견해했다. 짐짓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만들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완성했지만,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났다. 몇몇 업체에 문의한 결과, 100부를 기준으로 1부당 제작비용이 만 원을 호가했다.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탓일까. 디자인과 편집 등을 의뢰하지 않고 직접 만든 완성본을 업체에 넘기면, 그다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탁상용 달력이 나올 줄로만 알았다.
업체에서 기존 제공한 양식을 그대로 다운받아 사진과 글귀 등을 업로드하면 저렴하게 만들 수 있지만, 별도로 제작해 의뢰하는 거라면 비용이 크게 뛸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달력이 배달되면, 내심 아이들에게 새해 선물로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 됐다. 교실마다 홍보한 뒤 구입을 원하는 아이들에게 제값 받고 팔까도 고려해봤지만, 교사로서 할 짓은 아니다 싶어 포기했다.
민수 또한 좋아서 한 일인데, 친구들에게 돈 받고 팔게 되면 우리의 순수한 동기와 자발적인 노력이 폄훼된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차라리 완성된 달력 파일(PDF)을 아무나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유하는 것이 낫겠다고 제안했다. 어차피 '오늘의 역사'를 일상 속에서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자는 취지였으니, 달력이면 어떻고 인터넷이면 또 어떠냐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4.3 항쟁 70주년인데다, 내년이면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로서 헌법 전문의 맨 첫머리에 언급되는 3.1 운동 100주년이 된다. 그깟 돈 때문에 끝내 바라던 결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어쩌면 아이들에게 파란만장했던 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며 스스로 위안 삼게 된다. 끝으로, 탁상용 달력의 삼각 받침대 아래에 적어 넣고자 했던 글귀를 여기에 덧붙여야겠다. 이 글에서라도 달력의 완성을 보고 싶어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지만,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아예 기억에서 지워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공유하기
'빼빼로' 빼고 '전두환' 넣은 이 달력, 정체가 뭐냐면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