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막내 광복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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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수(sydney)등록 2018.03.27 15:22
다음 기사는 SNS를 통하여 아르헨티나 살고 있는 주인공의 아들 권혁태 선생을 통해서 알게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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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생 권오복의 집은 농사를 지었지만 낙동강 남쪽에서는 책이 제일 많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글읽기를 좋아하는 집안이었다. 권오복의 아버지는 한문 성경을 읽을 정도로 개화가 된 이였다. 권오복의 아버지는 글을 잘하는 덕분에 합방이 되고 행정구역을 편성할 때 일직면장을 맡으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내가 왜놈의 아전을 할 수 있느냐?" 면서 거절을 했다.

권오복은 전쟁 막바지인 1944년 9월에 안동, 의성 사람 10명과 함께 일본 보국대에 징집되었다. 운산역에서 출발할 때 아버지는 서럽게 울었다. 징집 병력이 평양에 집결해서 약 한 달 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널 때 권오복도 서럽게 울었다. 기차가 7일 밤낮을 달려도 산 하나 구경할 수 없는 없는 만주 벌판을 지난 얼마 후에는 기차가 낮에는 그냥 서있다가밤에만 달렸다. 미군의 폭격 때문이었다.

인구가 많은 지역이 가까워지자 학병들이 탈출을 하기 시작 했다. 권오복의일행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학병들은 받아주지 않고 자기들만 탈출을 했다. 무식한 시골 출신들을 데리고가면 도움이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탈출이 많아지자 부대장이 모두 집결 시켜놓고 일본도로탁자를 내리쳐서 탁자를 두 동강을 내면서 탈출하다 잡히면 즉석에서 처형한다고 경고를 했다. 동시에 원하는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 주겠다고 하기도 했다. 고추장이 먹고 싶다,또 마늘이 먹고 싶다 하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날 저녁 고추장도 나오고 일본인이 싫어하는 마늘도 나왔다. 일본군은 한국인을 전혀 차별 대우를 하지 않고 잘 해 주었다. 오히려북경까지 여행 하는 동안 사병의 경우는 조선인 병력들이 일본군을 제압할 정도의 위세이었다.

당시는 일본이 중국을 점령했다고 해도 철도주변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뿐이었고 그 외의 지역에는 여전히 중국의군대가 영향권 안에 있었다. 권오복 일행도 형양에서 부대가 남쪽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탈출을 하기로 결심을했다.

보통 조선사람은 일본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섞여 있어도 첫 눈에 표시가 났다. 하루는  중국 옷을 입은 사람이 슬그머니접근하더니 귀속 말로 어눌한 조선말로 중경에 임시정부가 있으니 탈출하여 가라고 간단하게 말하고 살아졌다. 그때까지 임시정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일행이 그 말 한 마디만 믿고 그 날 저녁 일직 조탑의 구 칠성, 쌍계의배 선두, 탑리산운의 이용득 합해서 7명이 소총과 식량을조금 마련해서 가지고 탈출을 했다. 밤새도록 갔는데 날이 밝고 보니 밤새도록 간 곳이 부대가 주둔한작은 앞 산을 돌아서 부대가 빤히 내려다 보였다. 할 수 없이 그 날은 산에 숨어있는데 수색조가 탈출병을찾으려고 난리였다.
다시 밤이 되어 서쪽으로 가야 하지만 일부러 동쪽으로 가서 수색대에 발각이 되지 않았는데 서쪽으로 갔으면 장거리수색을 해서 발각이 되었을 것이다. 본대는 3일을 수색하다가포기하고 남쪽으로 행군을 계속 했다. 다시 서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밤 중에 매복하고 있다가 행군 대열이끊어지는 빈 틈을 타서 삼일 만에 다시 서쪽으로 넘어 갈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은 일본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거대한 지방 토호나 지주가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나뉘어져 대립을 하고 있었지만 서로 죽기 살기로 미워하거나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대립하는 태세이었다. 44년 당시는 국민당 정부 보다는 모택동 군대가 훨씬 더 강해서 팔로군이 세력을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행이 탈출한 지역은 일본군의 접령 지역이어서 일본군이 탈출자 명단을 배포해서얼마든지 신고가 될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중국인들이 신고를 하지 않아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일행이 목탄차를 타고 높은 산길을 넘어가는데 고장이 났다. 나무를태워서 달리는 목탄차를 지금은 상상초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경유 공급이 제한된 북한에서는 얼마 전까지도 목탄차가 운행되었다고 한다. 목탄차는 숯을 태워서 나오는 열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숯이나 태워서 나오는 가스를 압축해서 폭발시켜 크랭크를돌리는 차이다. 이 차를 힘들게 밀어서 갔던 것이다.
일행은 학병 출신들과는 달리 일본어도 모르고 중국어도 모르는 농촌출신이었지만 권오복이 한문을 쓸 줄 알기 때문에필담으로 소통을 하면서 다녔다. 어느 민가에 가서 글로 조선인인데 일본군에서 탈출 했다고 설명을 하니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도 밥을 주었다. 밥을 먹고 나니 집주인이 손짓으로 기다리라고 해서 한참을 기다렸더니중국군 지역 방위대원이 와서 자기네 부대로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일단은 탈출에 성공인 샘이어서 비로소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일행은 중국군사위원회 별동대(대장 송태진 대좌 지휘) 대원 300여명이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있는 것을 야음(밤의 어두움)을 이용해 침투해서 일본군 보초 2명을 대검으로 사살하고 구출하는 도중 발각돼 교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여기에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중국군 별동대는 일본군을 잡으면 포상금을 타도록 되어있었다. 처음 우리가 도착한 부대에서 평소에는 같이 생활도 하고 때로는 일본군과 싸울 때는 같이 작전도하다가 상급부대에서 감찰이 나오면 일행을 감금해서 포상금을 타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일행을 옆 부대로 넘기면 여기서 똑 같은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일행은 이런 과정을 몇 번을 거치고나서 중경의 임시정부로 인도가 되었다. 막상 임시정부에 와서 보니 거리도 얼마 안 되는데 중국인들이포상금 때문에 일행을 뺑뺑이를 돌려서 거의 6개월이 걸린 것이다.
어떤 성에서는 인질로 잡혀 당시의 군벌들과 거래 대상이 되어 팔려 다니는 신세도 되기도 했다. 노예로 팔려 얼마간 노예 노동을 한 후 풀려 나기도 했다. 농장에서일해서 돈을 벌기도 하면서  결국은중경에 도착했다..

중국은 전쟁 기간에 거의 대부분을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샌드백 신세이어서 일본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만돌아도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만 다녔다. 그러나 관료들도 지주도 국민당 정부도 모택동 군대도 모두 전쟁을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을 다니면서도 세월이 가기를 바라는 느긋함이 보였다. 도망을 다닐 곳이 얼마든지있으니까 쫓아다니는 일본군만 허벌나게 힘든 것이다. 중국인들은 때가 되면 일본인이 저절로 중국에 흡수될 수 밖에 없다고 느긋하게 버티고 있었다. 실제로 중국 역사에는 원나라, 청나라가 한족이 아닌 몽고족 만주족이 침략해 들어온 나라이었다. 그러나중일 전쟁에서 군인 180만명 전사, 부상자 180만, 민간인이 1700 ~2200만명 사망했다는 통계가 있다.

일본군을 탈출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임시정부까지 온 것은 1945년 1월31일 김준엽, 장준하선생 그룹뿐이었고 권오복 그룹이 마지막이었다. 권오복 그룹이 도착한 시기는 한국인들의 임시 정부 합류가완전히 끊어진 때이었기 때문에 임정 요인들은 무지한 시골 사람들이 중국 6천리를 뚫고 중경까지 온 것을대단히 기특하게 여겼다.

1940년 8월 기강에서중경으로 옮겨온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원의 원조를 받아 요인들과 가족들을 위해 토교에 15년 기한으로 5천원을 내고 2천여 평의 땅을 사서 토교 동감 폭포 위에 큰 기와집 3채를 짓고 길가의 2층 기와집을 사서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토교에 한인청년들을 모아서 일종의 보충대를 운영했다. 토교에거주한다고 해서 토교대로 불렀지만 상설 조직체가 아니었고, 한인청년들이 집결되는 상황에 따라 임시로편성되었다.

1945년 2월 토교로옮겨 기독청년회관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미 한국 광복군 청년훈련반 교육을 통해 교육과 훈련을 받고 소위로임관하였기 때문에 토교대에서 별도의 훈련을 받지 않고 한국광복군의 각 부서로 배치가 결정될 때까지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일행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편입되어 임시 정부 청사의 경호를 했다.
기독교 회관에서 예배를 드리고 연희 전문학교 출신인 한필동 선생으로부터 영어 교습을 받았다.  후일 헌병감으로 거제도 포로 석방을 지휘했던유관순의 이종 조카인 한필동 선생이 예배를 볼 때 늘 설교를 담당 했다. 조선에서 학교 교육을 받지못한 권오복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권오복은 토교에 오자마자OSS 대원 선발이 있었을 때 선발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영어를 열심히 해서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OSS 훈련에 꼭 참가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임시 정부 안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친미주의로 갈라져 갈등이있었지만 농촌 출신인 권오복은 세상 물정에 어둡기도 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느 편에도 가담 하지 않았다.장준하가 1918년 생, 김준엽이 1920년생, 권오복은 1923년생으로 제일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김구 선생은 어린 권오복을 지극히 아껴서 백현이라고 호를 지어 주셨지만 백범 보다 나으면 안 된다고 어리석을우(愚)를 써서 백우라고 짓고 평생 썼다.

중경은 근처가 노천 광산이 있고 인근 산에 고사리가 많았다. 중국인들은그것을 독초로 여겨 먹지 않았는데 젊은 요원들이 고사리를 꺾어다가 볶음밥을 만들어 맛있게 요리를 한 것을 먹어 본 후로는 인기 요리 재료가 되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으니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단 상해로 가야 했다. 임시정부도중경에서 철수를 해야 일단 했으나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서 뗏목을 타고 가게 되었다. 중국 대륙의 깊숙한내륙에 있는 중경에서 해안에 있는 상해까지 양자강을 2,400 km를 뗏목으로 가는 것이다. 양자강은 무려 6300km에 달하는 중국에서 가장 길이가 긴 강이다. 양자강 상류에서 새끼염소를 태운 뗏목을 타고 중간중간에 이 고을 저 고을 들르면서 천천히 내려오면 어미 염소가될 무렵에 하류에 도착한다고 한다. 하류인 상해에 도착해서 염소를 팔고 다시 걸어서 출발지인 상류까지걸어가는 데에 1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뗏목에 사람뿐만아니라 오리 병아리도 실려서 '우창 1000리, 무한 1000리. 장사 1000리, 임계 1000리, 유주 1000리' 라고하는 총 600리를 흘러간 것이다. 실제로 중국 사람들이상해에서 오리도 팔고 뗏목도 팔고 운임도 받고 하는 것을 보고 돈 버는 재주에 놀랬다..

45 년 11 월부터 46 년 6 월 해체될 때까지 상해 교민 관리소 요원으로 일했다. 이 당시 특별하게 기억할 만한 사건은 박정희가 1945년 9월 21일 광복군에 편입된 사건이다. 당시 상해 광복군파와 일본군 출신들 사이에 갈등도 있고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처단을 하고 정리를 하자는 강경파들과그들도 조국 건설에 일원으로 동참시켜서 귀국시키자는 파들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백범은 강경파들을 설득해서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병들을 귀국 대열로 편입을 하는 방향으로 정리를 했다.

권오복은 46 년 6월말 상해 교민 관리소가 해체되자 귀국해서 45년 말에 귀국 했던 김구 선생이 있는 경교장으로 들어갔다. 임시 정부에서 귀환했던 인사들 사이에서 여전히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져 심하게 갈등을 빚고 있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출신 중에서 학도병이나 일본 군대 계열은 출세를 했지만 시골에서 겨우 글을 읽고 배운 권오복은우파와 좌파의 극심한 대립 사이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당시는 복잡한 정세 속에서 정확한 정보 없이 풍문으로만듣고 행로를 결정지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결과 본인은 특별한 소신이나 신념이 없는데도 정파 싸움에휘말려서 희생된 이들이 많았다. 임정의 경호대장이 있었던 김동수 장군이 국방경비대로 같이 가자고 했지만8 월 말 쯤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에서 남편의 소식을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아내는 그때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서 사망한 것으로 알았지만 권오복은 보안 관계로 일체의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의 사진, 광복군 모자, 옷, 임시정부 명단과 주소를 적은 수첩, 휘장 및 뱃지 등을 가지고있었지만지실에 있을 때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이 격돌해서 낮에는 우익의 세상 밤에는 좌익의 세상으로 혼란스러워 혹시라도 그것들이 어떻게 이용될 줄 몰라 모두불에 태워 버렸다.

1970 년 말쯤 상해에서 함께 귀국했던 이승주가 물어 물어 시골에묻혀 살았던 권오복을 찾아왔다. 그 때 권오복은 이승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박정희가 상해 교민 수용소 시절 자신을 광복군으로 편입을 시켜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해서 1963년에 독립 유공자 표창법을 제정해서 권오복을 포함하여 관리요원 16 명을포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 때 표창을 받은 이들에게는 광명시 철산동에 독립유공자 아파트도 주고 연금도주고 자녀들 학비도 면제 시켜 주고 특별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다. 권오복은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700 번에 묻혔다.

다음은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기록이다.

권오복(1924. 5. 2 ~ 2007.12.18)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44년 9월 일본군 제44부대로징집되어 중지(中支) 지구로 이동 중 호남상 형양(衡陽) 지방에서 탈출하였다. 광복군에입대하여 총사령부 경위대(일명 土橋)에 편성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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