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니 알몸의 뿌리를 잊어버리는

시골에서, 어디에도 사소한 풍경은 없다

등록 2018.04.18 08:40수정 2018.04.1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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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은 시골에서 닷새는 도시에서 지낸다. 손바닥만한 농막에서 풍경과 함께 지내는 일은 스스로 선택한 '단절'과 '고립'이다. 관계가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가끔은 관계를 끊고 자연에 몸과 마음을 맡겨도 좋을 일이다. <시골에서, 어디에도 사소한 풍경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시골얘기를 산문과 시로 쓸 계획이다.-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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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없었지만 움직이고 있었다. 성장속도는 하루에 0.1mm나 됐을까. 어둠속에서 빛이 있는 곳을 찾아, 더 큰 숨을 쉴 수 있는 곳을 향해 길었던 추위와 겨울을 뚫고 마침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지난주, 잊고 있던 꽃이 피었다. 구근을 사다가 마당에 묻은 것은 지난해 11월. 외국계 대형마트에서 구근을 판다는 것을 안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냥 묻어두면 봄에 필 것이라는 조언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3월 봄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싹이 올라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막연한 기대를 했다. 4월로 접어들자 꽃망울을 맺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함박 웃는 표정을 지었다. 옅은 화장기여서 더욱 예뻤다. 별다른 관심도 없었던 튤립의 꽃말을 찾아보기도 했다. 전해오는 꽃말보다는 '어둠의 색채는 하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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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뚫고 올라와 싹을 틔우는 튤립 2018년 3월17일 모습, 싹이 올라와 있다 ⓒ 정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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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햇살을 즐기는 튤립 2018년 3월31일 모습, 잎새의 빛깔이 짙어지고 있다 ⓒ 정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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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피운 튤립 2018년 4월 14일 모습, 튤립이 자신의 존재를 맘껏 뽐내고 있다. 뽐내도 좋을만큼 겨울을 견뎠다 ⓒ 정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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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의 하늘보기 2018년 4월14일 모습. 겨울을 견딘 봄의 선물이다 ⓒ 정덕재


튤립을 키워보는 것은 처음이다. 구근을 심은 뒤 물을 주었던 기억도 없다. 문득문득 튤립을 심었다는 것을 상기하곤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별다른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지난 3월, 첫 싹을 보면서 작은 알뿌리 하나에 가득 담겨져 있던 생명의 기운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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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파내고
너를 묻었다
묻고 나니
답이 궁금했고
묻고 나니
얼마나 숨이 찰지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보이지 않으니 잊었다
그림자가 자라지 않아
외로움이 없고
숨을 쉬지 않으니
향기도 없는 줄 알았다
흔적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는 습관은
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싹이 올라오고
잎새가 가슴을 펴고
빛깔로 꽃을 만드니
튤립
반가운 표정을 보며
금세 겨울의 뿌리를 잊는다
맨살로 견뎠던
알몸을 잊는다
봄과 붙어있는
겨울을 잊는
1밀리미터도 내다보지 못하는
한심한 망각
낮게 깔리는 향기가
뒤통수를 친다
#튤립 #봄기운 #4월 #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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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글쓰고 영상기획하고, 주로 대전 충남에서 지내고, 어쩌다 가끔 거시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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