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열적인 배롱나무의 진분홍 꽃. 화려한 봄꽃도, 향기 진한 가을꽃도 아닌 것이 정말 아름답다. 요염하기까지 했다.
이돈삼
배롱나무 꽃은 어느 한 철, 눈부시도록 화사하게 피었다가 며칠 만에 속절없이 꽃잎 떨구는 다른 꽃과 달랐다. 꽃을 석 달 하고도 열흘 동안이나 피운다. 그것도 한 송이 한 송이가 오래 머무는 게 아니다. 날마다 새로운 꽃을 피워낸다. 꽃송이도 무수히 많다. 무더운 여름에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도 애틋하다.
배롱나무의 이름도 재밌다.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고 백일홍, 나무백일홍, 목백일홍으로 불린다. 껍질을 손끝으로 긁으면 이파리가 움직인다고 '간지럼나무'로도 불린다. 꽃이 질 때쯤 벼가 누렇게 익어 쌀이 된다고 '쌀밥나무'라고도 한다.
배롱나무 아래로 난 길도 다소곳하다. 진분홍 꽃잎이 떨어져 바닥에 깔리면 환상적인 꽃길이 되겠다. 잠시 그 풍경을 그려본다. 금세 시 한 소절이 튀어나올 것 같다. 산중에 들어앉은 탓에 배롱나무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비 내리는 날 우산 쓰고 걸어도 운치 있겠다.

▲ 영사재와 어우러진 배롱나무 고목. 영사재는 함평이씨 효우공파의 제실이다.
이돈삼

▲ 배롱나무 옆의 영사재. 영사재는 함평이씨 효우공파의 제실이다. 1804년에 처음 지어졌다.
이돈삼
배롱나무 옆의 영사재도 멋스럽다. 영사재는 함평이씨 효우공파의 제실이다. 1804년에 처음 지어졌다. 묘는 이보다 300여 년 앞서 조성됐다. 배롱나무도 그때 심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배롱나무와 제실, 묘지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오래 전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조화롭다.
영사재에서 배롱나무 꽃너울을 바라본다. 절정의 시기를 지났지만, 여전히 한 폭의 그림이다.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작품사진이 된다. 이내 마음도 한결 더 느긋해진다. 살랑이던 바람결이 가을의 내음을 전해준다. 간간이 들려오는 산새와 풀벌레 소리도 정겹다. 배롱나무 꽃으로 이름난 담양의 명옥헌원림에 견줄 만한 풍경이다. 사무치게 호젓해서 더 좋다.
"운중반월(雲中半月)이라고 하죠. 구름 속에 담긴 반달처럼, 아늑한 공간입니다. 천하의 명당자리죠. 선친들이 여기에 묘를 쓰고, 배롱나무를 심은 것으로 봅니다."
영사재에서 만난 이영호(함평군 나산면)씨의 말이다.

▲ 수령 500년의 배롱나무와 어우러진 영사재 풍경. 제실과 조화를 이룬 배롱나무 고목이 더 멋스럽게 보인다.
이돈삼

▲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난 배롱나무 꽃. 살랑이던 바람결이 배롱나무 꽃을 간지럽히고 있다.
이돈삼
배롱나무에 얽힌 그의 추억은 제사와 성묘를 넘어 학창시절 소풍과도 엮인다. 이 일대가 '단골' 소풍장소였다고. 당시 학생들은 녹음기를 틀어놓고 막춤을 췄다. 친구들의 장기자랑도 흥겨웠다. 배롱나무 부근에 살짝 숨겨둔 보물을 찾았을 땐 정말이지 오졌다. 어린 학생들한테 오래도록 남을 추억의 시간이었다. 이씨의 회고다.
"소풍 장소로 최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길이 넓지 않고, 외길이었거든요. 학생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 상상해 보십시오.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도 선생님들이 통제하기에 정말 좋았을 테고요."
▲ 배롱나무 꽃은 한 철, 눈부시게 피었다가 며칠 만에 꽃잎 떨구는 다른 꽃과 다르다. 꽃을 석 달하고도 열흘 동안 피운다.
이돈삼
▲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이규행 가옥. 영사재 앞 배롱나무를 심고 가꾼 함평 이씨 효우공파의 옛집이다.
이돈삼
이곳에 배롱나무를 심고 영사재를 지은 함평이씨 효우공파는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에 모여살고 있다. 효우공 이접의 후손들이다. 초포리에 있는 이건풍 가옥과 이규행 가옥이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함평생활유물전시관에선 옛 사람들의 지혜와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나산면은 조선시대에 모평현에 속했다. 1409년 함평현과 모평현이 합해지면서 함풍현이 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중심에 섰다. 강골촌으로 꼽는 3성(장성 곡성 보성)·3평(함평 남평 창평)의 거점이었다. 배롱나무는 근현대의 움푹진 곡절을 기억하고 있다.
▲ 함평생활유물전시관 전경. 옛 사람들이 쓰던 생활용품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 선인들의 지혜와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함평군 나산면에 있다.
이돈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공유하기
500년 된 배롱나무, 사무치게 호젓해서 좋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