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국립오페라 극단명 변화
강재인
"정말 왕정, 공화정, 제정(帝政), 공화정, 제정, 공화정으로 점철되었네요. 저 건물이 세워진 건 언제였어요?"
완공은 제3공화국 때인 1875년이지만 착공은 나폴레옹 3세 때인 1861년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가 오페라 전용극장을 새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858년이었다. 그해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들이 터뜨린 위장 폭탄사건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좁은 골목이 아니라 탁 트인 넓은 장소에 건립할 오페라 전용극장의 설계도를 공모했다. 이에 응모한 설계가는 모두 171명이었는데, 1∼2차 심사를 거쳐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은 35세의 젊은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작품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르니에가 공식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날, 내적으론 황실 건축가 비올레 르 뒤크를 지지하던 황후가 가르니에를 향해 "그게 대체 무슨 양식이오? 그리스 양식도 아니고 루이 15세나 루이 16세 양식도 아닌 것이" 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가르니에는 "이건 나폴레옹 3세 양식인데 황후께옵서 불평을 하시다니요!"하고 응수했다. 이에 흐뭇해진 나폴레옹 3세는 가르니에를 불러 귓속말로 "걱정하지 말게나. 사실 저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네" 하고 속삭였다고 한다.
특권과 정실이 판치던 왕조 시대에 설계도를 공모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황후의 지지를 받던 건축가를 제치고 일개 무명 건축가의 설계도가 채택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진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얘기다. 완공되자 오페라 가르니에 건축물의 영향력은 과연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오페라 가르니에를 모방한 대표적 건축물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의회도서관의 토머스 제퍼슨 빌딩(1897)이다. 폴란드에서는 율리우스 슬로바키극장(1893), 바르샤바 필하모닉 공연장(1901), 우크라이나에서는 리비우 오페라극장(1900), 키예프 오페라극장(1901), 브라질에서는 아마조나스극장(1896), 리우데자네이루시립극장(1909), 베트남에서는 하노이 오페라극장(1911) 등이 모두 오페라 가르니에를 흉내 낸 건축물이다.
"오페라 가르니에도 그렇지만 오늘 둘러본 개선문과 샹젤리제도 모두 만만치 않은 문화유산이던데요. 심지언 라파예트 백화점까지. 파리는 정말 역사와 기억의 공간 같아요."
"유산이 많다는 것뿐 아니라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니? 아까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파리 시가지의 아름다움! 어디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넌 그 이유가 뭐라 생각되느냐?"
"예술성?"
"통일성이나 다양성, 또는 조화로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 분명 그런 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지적한 예술성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아름다움은 힘이거든."
"아름다움이 힘이라고요?"
그렇다. 역사상 파리는 여러 번 외침을 당했다. 나폴레옹 때는 유럽동맹군에 점령당했고, 보불전쟁 때는 프로이센군에 점령당했으며, 2차대전 때는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파리는 기념사진 같은 것이라도 찍어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곳이지 전쟁도구로 파괴하고 싶은 도시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파리의 아름다움이 파괴를 막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고, 그게 바로 아름다움의 힘이라고 하자 딸이 눈빛을 빛냈다.
서양사를 보면 처음엔 그리스이고 다음은 로마제국이다. 그다음은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가 별로 없다가 13세기경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권력 발전소 노릇을 한다. 그 영향력을 사실상 프랑스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 17세기의 루이 14세였다. 그와 동시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열었던 이탈리아로부터 문화의 주도권을 가져온다.
이후 프랑스가 유럽의 모든 문화·예술·요리·패션·라이프스타일·에티켓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해주고 나서 "이 말은 전에도 한 번 했지?"하고 덧붙였더니 딸이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팍스 브리태니커의 영국도 있었잖아요?"
"있었지. 하지만 영국은 섬나라다. 젊었을 때 런던에 가본 일이 있는데 파리에 비하면 어쩐지 시골 같은 느낌이었다."
"미국은요?"
미국은 힘이 있지만 역사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로마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미국은 유럽 문화를 끌어들였다. 그 결과 미국 상류층은 유럽식으로 먹고 유럽식으로 입고 유럽식으로 생활했는데 그 유럽식 모델의 상당 부분이 사실은 파리였던 셈이라고 하자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뉴욕 맨해튼의 오래된 아파트들을 보면 파리 아파트와 비슷해요."
"그렇지? 생각해봐라. 헤밍웨이 등 잃어버린 세대가 왜 파리에 와서 살았는가를. 한두 명이 아니었잖아? 그들에겐 '도시의 원점'인 파리가 마음의 수도였던 거야. 미국의 작가나 예술가들에겐 파리의 도회문명적 감성이 필요했던 거지. 그런데 그게 미국인만 그랬겠어? 스페인, 이태리, 폴란드, 벨기에,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아일랜드 예술가와 작가들도 다 비슷했단다. 그래서 문화의 수도인 파리로 몰려들었던 거야."
▲ 오페라광장의 어둠은 한층 짙어졌지만 조명을 받은 오페라 가르니에는 오히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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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카페 드 라 페의 노천 테이블에서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어둠은 짙어졌지만 조명을 받은 오페라 가르니에는 오히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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