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이런 거라고 왜 알려주지 않았죠?

알랭 드 보통 장편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등록 2018.10.18 20:20수정 2018.10.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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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한 달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평생을 행복하려면 봉사를 하라'는 말이 있다. 열렬히 사랑해 결혼한 서로의 눈에 덧씌워진 콩깍지가 벗겨지는데 한 달이면 족하다는 말은, 연애 감정이나 사랑의 허구성을 말해주는 것 같다.

86년 한국여행 중인 젊은 프랑스인 커플을 프랑스문화원에서 만나 며칠 간 서울 시내 투어에 동행한 적이 있다. 그들은 여행 커플로 1년 가까이 전 세계 일주를 하는 중이었다. 며칠 겪어 보니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1년 간 살아 봤으니 서로의 장단점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기해 긴 여정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간다기에 돌아가서 결혼을 할 것인지 물었더니 '그런 생각 안 해봤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무척 안타까워하며 둘이 꼭 결혼을 해서 알콩달콩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지만, 그들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반복했다.

그들이 돌아갈 때 주소를 주고받았지만 서로 연락을 안 했는데 몇 년 후 예쁜 아기의 얼굴을 붙인 엽서가 날아왔다. 둘이 결혼을 해서 낳은 아기라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식으로 탄생의 기쁨을 전하는 모양이었다. 프랑스의 이혼율이 높아지고 결혼을 기피한다던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요즘 대한민국에서도 결혼을 기피하는 추세다. 아니 기피라기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모순이 만들어낸 비자발적 결혼 포기 상태가 늘어나는 것이리라. 결혼이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위 일상 사랑의 기술을 결혼이라는 현실을 통해 풀어냈다. ⓒ 은행나무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행나무)은 알랭 드 보통이 25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닥터 러브'라는 애칭으로 불린다는 그에게 언제 다시 소설을 쓸 거냐고 물으면 "사랑에 대해 쓸 것이 충분히 생기면'이라고 대답했다던데, 다시 소설을 썼으니 달콤한 낭만적 사랑을 기대해도 좋을까.

그의 이번 소설은 '낭만적 연애 '보다 '그 후의 일상'에 방점이 찍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늙어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방식을 풀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결혼이라는 것은 낭만적 감정으로 싹을 틔우고 연애와 사랑으로 꽃피워 신뢰로 결실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알랭 드 보통은 낭만적 연애로 결혼에 골인한 커플의 결혼 이후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결혼한 커플이 어떻게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고, 아이를 낳고, 권태기와 외도와 실망을 극복하고 성숙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담담하게 수필처럼 펼쳐낸다.


인간은 결혼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낭만적 연애를 한 뒤 결혼에 골인한 커플일수록 더욱 그럴 거다.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고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건 도박일지도 모른다.

결혼이 도박이라면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결혼은 해도 안 해도 후회하게 되니 기왕이면 해보고 후회를 하라'는 말에 동감한다. 한껏 포장된 낭만적 연애 감정에서 벗어나 서로의 민낯을 보고 실망하고, 그 실망감을 극복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결혼한 커플이 일구는 삶의 방식이니 말이다.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도 무한히 친절한 도박.-65쪽

주인공인 라비는 어릴 적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불안 심리를 폭력적으로 풀어내는 불안정 애착을, 커스틴은 감당하기 힘든 일은 침묵하거나 책이나 음악으로 도피하는 방식인 회피형 애착 방식을 고착시켰다. 

둘은 결혼 후 서로 부딪칠 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라비는 화를 내고 커스틴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방식으로 말이다. 라비는 그런 커스틴의 태도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지고 커스틴은 자신의 방식으로 도피를 거듭하면서 서로 오해의 간극이 커진다. 

다른 환경과 문화적 풍토에서 살아 온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음식, 잠버릇, 취향, 정치적 성향, 등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자신과 성향이 너무 다른 상대를 발견하는 순간  당황할 것이다. 결혼을 괜히 했나, 결혼을 지속해도 좋을까 하고 말이다. 결혼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대화와 협상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협상을 위한 인내심이 없으면 비통해진다. 원인도 잊은 채 화가 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는 쪽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려고만 하고, 잔소리를 듣는 쪽은 자신의 반발이 합리적인 반론이나 그도 아니면 가엾고 용서받을 만한 성격상의 결함에서 나온 것임을 더는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양 당사자는 그들에게 똑같이 지루하기만 한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 79쪽

알랭 드 보통은 낭만적 연애 감정이 꽃피운 화려한 꽃이 시든 후 사랑이 아름다운 열매로 맺히기 위해서 서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신혼 초 인테리어나 가구 고르기, 자녀 출산과 양육, 권태기, 외도, 경제를 책임지는 문제에서 서로 다른 성격으로 부딪치는 크고 작은 일상의 싸움과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말이다. 일상적 단계를 모두 거치고 난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함께 이뤄온 것에 황홀한 충성심을 느낀다. 다투게 되고 화나고 웃음 나고 어리석고 아름다운 그들의 결혼 생활은 틀림없이 그들만의 것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기까지 온 것,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광기를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노력하고 그때마다 새로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결혼 생활을 지켜 온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 290쪽
 
그렇다. 비관적인 철학자의 말처럼 '결혼이 무덤'은 아닐지라도 '결혼은 현실'이다. 낭만적 연애 감정 대신 끊임없는 노력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연민하고 신뢰를 쌓아가면서 생의 장벽을 넘는 여정에 함께 하는 동지가 되어 길 위를 걷는 순례길 같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결혼을 했더라도 그 결혼을 지속하지 않는 일도 다반사다. 이들에게 결혼은 결코 만만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넘지 못할 장벽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위로받을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다. 알랭 드 보통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부분의 러브스토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자신의 실제 관계는 거의 다 하자가 있고 불만족스럽다. 많은 경우 별거와 이혼이 불가피해 보이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를 자주 인도하는 미적 매체들이 부과한 기대에 따라 우리의 관계를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잘못은 삶이 아닌 예술에 있다. 우리는 갈라서기 이전에 보다 정확한 이야기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작에만 너무 얽매여 있지 않은 이야기, 완벽한 이해를 약속하지 않는 이야기, 우리의 문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려놓고 사랑의 여정에서 거쳐 갈 길이 우울하더라도 희망적임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 284쪽
덧붙이는 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김한영 옮김/ 은행나무/ 13,500원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지음, 김한영 옮김,
은행나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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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일상 속의 사랑 #협상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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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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