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좀 따가라"는 마을 할머니의 속내

가을 고추밭에서 오고 간 마음, 이게 바로 시골살이의 행복

등록 2018.10.29 13:41수정 2018.10.29 13:4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4일 아침. 차를 타고 출근하려는 아내를 마중나갔다. 평소에는 곧바로 출발하는 아내가 오늘따라 잠시 차를 멈추고 길가 옆 고추밭에서 일하시는 마을 엄니(우리 마을 최고령 팔순엄니)께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을엄니와 마을아들 둘이서 오전 내내 고추를 땄다. 수다를 떨면서. ⓒ 송상호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내 배웅 후 홀로 남겨진 나를 엄니가 부르신다.


"일루 와서 고추 좀 따가셔."

그렇게 고추 따기가 시작됐다. 우리 마을에서 최고령이신 마을 엄니와 말이다. 엄니는 자신의 집에 가져갈 고추를, 나는 우리 집에 가져갈 고추를 주섬주섬 바구니에 담았다. 엄니는 빨간 고추와 빨갛게 물들어 가는 고추를, 나는 주로 풋고추를 땄다. 

처음에는 고추밭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나를 위해 고추 좀 따 가라고 하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엄니의 말씀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사실은 읍내 사는 동갑내기 친구에게 오늘 고추 따러 오라니께 병원 신세 지느라 못 온다고 하자녀. 그래서 심심할 줄 알았더니... 근디 얘들 아빠랑 이야기 나누면서 따니께 심심하지 않아 좋구먼."
 

그랬다. 엄니가 나에게 고추를 따가라고 한 속내(?)는 당신이 고추를 따실 때 말벗을 두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친구분 대타(?)였다고나 할까. 평소 마을회관에서도 나를 보면 반가워하시고, 뭐라도 챙겨주시려고 하고, 나랑 대화를 하시기를 즐기던 엄니였다. 물론 엄니는 친구분이 계셨어도 고추를 따가라고 말씀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알고 엄니도 아는 바다. 어쨌거나 아무려면 어떠랴.
 

고추따시는 마을 엄니 빨갛게 익힐 고추만 따신다. ⓒ 송상호

 
상상해보라. 먼 산엔 단풍이 물들어가고, 마을 논은 가을걷이가 끝나 한가롭고, 하늘엔 가을 구름이 내려다보는데, 그 마을에서 최고령인 할머니와 최연소 애들 아빠가 둘이서 고추를 따며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엄니는 미국에 가서 사는 아들네가 한국 한 번 오려면 비행기 삯만 해도 엄청나게 든다는 둥, 우리 마을 누구네가 어떻다는 둥 하신다. 수다가 끝이 없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맘을 담아) 오늘은 아직 안 나간 겨? 언제 가는 겨?"
"(더 따고 싶은 맘을 담아) 아 네. 엄니! 오늘은 오후에 나가유."
"(계약이 합법적으로 성사되었다는 맘으로) 그랴. 그럼 시간 좀 있네. 많이 따 가. 어차피 서리 내리면 데쳐져서 버려야 헝게."
"(그 계약에 동의하는 맘으로) 아, 네..."
"(그 계약이 효과적인지 확인하는 맘으로) 근디. 이거 애들 엄마가 좋아하려나. 괜히 많이 따왔다고 뭐라 하지 않것어?"
"(그 계약이 충분히 효과적임을 확인시키는 맘으로) 아, 아녀유. 애들 엄마도 이거 먹고 싶다고 노랠 불렀시유."


그랬다. 사실 이제야 털어놓지만, 아내는 이 밭을 지날 때마다 "저 풋고추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꿈은 이루어진다. 만만세!

시골에 살면 마을어르신들이 가끔 그러신다. "애들 엄마, 애들 아빠! 밭에 있는 채소 좀 따가. 내가 시간이 없어서 못 따주니께 말이여."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나. 주인도 없는 밭에 들어가 어찌 따온단 말인가. 아무리 허락하셨다고 해도 쉽지 않다.

고맙고, 고맙다
 

울마을 최고령 팔순 엄니 아직도 생생하시다. ⓒ 송상호

 
아무튼 엄니와 말하다 보니 어느새 오전 내내 고추를 따고 있다. 집에 갖다 놓고 또 따고 해서 모두 3포대나 땄다. 엄니가 계속 말씀하시니 어디서 끊어야 되나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낮 12시가 넘어가니 엄니가 말씀하신다.

"오후에 나가야 하는 거 아녀?"
"(이때다 싶어서) 아, 네 맞아유."


이렇게 오전 내내 딴 고추를 집에 있는 대야에 쏟아 놓으니 엄청 많다. 자신이 출근한 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엄니에게 인사를 한 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서 당장 메시지를 보냈다. 기쁜 소식이라며 보냈더니, 아내는 그냥 기쁜 소식이 아니라 엄청난 기쁜 소식이라며 전화가 왔다. 아내의 목소리가 청량하다.

그런데 이 많은 고추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아내와 나의 이심전심, 그것은 주위의 사람들과 나눠 먹는 거다. 아내가 봉지마다 담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 줄 게 분명할 거라 믿고 고추를 많이도 땄다.

사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어제부터 계속 행복하고 있다. 앞으로 며칠은 고추로 인해 행복할 예정이다. 그 고추를 봉지로 전해줄 수 있어 고맙고, 받은 사람들의 감사인사에 고맙고, 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먹을 수 있어 고맙고, 그 엄니의 말벗이 되어준 대가로 고추를 얻을 수 있어 고맙다. 
 

수확한 고추 오전 내내 수다떨면서 땋는데 많이도 땋다. 주위 사람들과 나눠 먹을 고추들이다. ⓒ 송상호

#농촌 #송상호 목사 #더아모의집 #시골 #고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배달하다 숨진 26살 청년, 하루 뒤에 온 충격 메일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