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미터 높이의 아파트들이 사면발방으로 뻗어 있는 파리 시가지
Aleksandr Zykov,flickr
너무 답답해 미칠 것 같다는 심정으로 걸어 나오다가 사거리의 광장을 만나면 비로소 답답한 가슴이 뻥 뚫렸다. 파리의 광장은 이래서 필수적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파리의 아파트들은 잇대어 지어졌기 때문에 햇볕이 방에 잘 들지 않는 것은 물론, 통풍도 잘 되지 않는 편이었다. 이런 아파트에 갇혀 살면 답답함 때문에 자연스럽게 카페로 나오게 되지 않을까?
"아빠! 어디 좀 앉으시겠어요?"
"그러자꾸나."
아빠와 나는 비교적 한산한 카페에 들어가 와인을 주문했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적당히 선선한 밤 기온과 와인... 아빠가 술잔을 기울이며 물으셨다.
"파리를 관광한 소감이 어떠냐? 허전한 느낌 같은 것은 없데?"
나는 아빠가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옛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람블라(La Rambla)거리를 찾아갔다."
아빠는 람블라 거리의 카페들을 보시기 위해 그곳에 갔다고 한다. 스페인내전을 앞둔 1930년대의 그 거리엔 유럽과 미국의 작가와 시인, 지식인, 무정부주의자 및 분리주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높은 이상과 불 뿜는 열정 속에서 밤마다 피어오르던 음모와 혁명의 불길은 결국 그들 자신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아이러니를 맞게 된다. 죽음과 종신징역의 운명 아래서 당대의 주역들이 호흡하던 공간을 한번 꼭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빠가 방문하셨던 1970년대 말에는 람블라의 낭만적인 카페들이 상당수 문을 닫고 대신 자동차판매점의 쇼룸이나 가구점, 또는 옷가게 같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가슴이 허전하던지. 머릿속에 자리 잡은 환상과 현실이 어긋날 때 생기는 허전한 느낌 말이다."
"전 이번 파리 여행에 만족해요. 프랑스 문화와 역사를 만나는 대목이 많아서 좋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자기 집과 파리 두 곳뿐이다(There are only two places in the world where we can live happy: at home and in Paris).'"
파리에 대한 극찬이다. 장 메랄(Jean Méral)이 쓴 <미국 문학에서의 파리>란 책을 보면 1824년부터 1978년까지 파리를 무대로 한 미국 소설이 2백 편 넘게 생산됐다고 한다. 그런 점은 영어 단어에서도 느껴진다. 가령 미국에서 쓰는 resumé(이력서), connoisseur(감식전문가), amateur(아마추어), gourmet(미식가), raison d'être(존재 이유), bouquet(꽃다발) 같은 단어는 다 불어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본 사요궁 말이다. 그곳에 있는 사요국립극장에서 최승희가 무용공연을 한 것이 1938년이라고 했잖아? 최승희처럼 우리 이전에 파리를 밟은 한국인들은 누가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궁금하죠. 하지만 파리에 오는 한국인이 하도 많으니까."
"아니, 요즘 관광객 말고."
"누가 있었죠?"
파리 땅을 처음 밟은 한국인
파리 시가지를 처음 밟은 한국인은 1883년 보빙사절단의 정사였던 민영익과 그 수행원인 서광범, 변수 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공부하던 유길준이 귀국길에 파리를 들렀는데 그것이 1885년이고.

▲ 한국인으로서 파리 시가지를 처음 밟았던 보빙사절단의 정사 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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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뒤엔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가 있었다. 그는 유길준이 파리를 방문한 지 7년 뒤인 1890년부터 약 2년 반 동안 파리에 살았다. 일본에 건너가 신문사 식자공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자비유학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어도 일본에서 배웠던 모양이다.
프랑스 법을 공부하려고 소르본대학 근처에 숙소까지 마련했지만 입학이 잘 안 되었던지 대학에 다니는 대신 기메(Guimet)박물관 촉탁으로 취직해서 <춘향전>을 <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é)>, <심청전>을 <다시 꽃피는 고목(Le bois sec refleuri)>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을 냈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꽤 지식이 있었던 모양인데 파리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게 아쉽다고 아빠는 말씀하셨다.

▲ 약 2년 반 동안 파리에 살았던 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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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도 파리에 왔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맞아. 유럽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파리를 방문한 것이 1897년이었지."
"그다음은 누구예요?"
해방 후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백성욱이다. 그는 1920년 파리의 보베(Beavais)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또 문교장관을 지낸 김법린이 1921년 소르본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고, 철학자 정석해가 1924년 역시 소르본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화가 나혜석이 파리로 유학 온 게 1927년이고.

▲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였던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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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왔어요? 자비였어요?"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의 부영사였는데,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 포상을 받아 부부가 함께 해외 위로여행을 왔다더라. 그 길로 나혜석은 미술을 공부하다가 1928년 파리에 온 천도교 교령 최린과 사랑에 빠져 남편과 이혼했다."
"그 시절에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다음은 누구예요?"
해방 후 프랑스 공사, 농림부 장관 등을 역임한 공진항으로 1931년인가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 다음은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 외교관 시험에 수석 합격한 장철수라는 사람이다. 해방 전 조선인으론 유일한 직업외교관이기도 했다. 그 장철수가 1930년대 초 파리의 일본대사관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다음은 1938년 사요국립극장에서 무용공연을 한 최승희와 그 남편 안막.
그 다음은 6.25의 전쟁 상처를 안고 파리로 온 화가들이었다. 이를테면 이성자(1951), 김환기(1956), 남관(1958), 권옥련(1958), 이응노(1958), 한묵(1961), 방혜자(1961), 김창렬(1968) 등이다. 한편으론 안응렬, 이휘영, 김붕구, 오현우, 이환, 방곤, 박이문 등의 불문학자들도 유학을 왔다고 한다.
"작곡가 윤이상도 파리에서 공부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1956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해서 음악 이론을 배웠다더라."
"피아니스트 백건우는요?"
"1980년대 이후지.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지휘자 정명훈 등도 파리에 왔었고. 현재 활동하는 화가로는 우리가 잘 모르는 분들도 많고. 또 파리에 유학한 학생들도 상당히 많을 거고."
"정말 많겠네요."
"거기다 수많은 관광객을 생각해봐라."
본래 땅 위엔 길이 없었지만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고 루쉰(魯迅)이 말했는데, 이제 서울과 파리 사이엔 아주 큰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첫걸음을 뗀 지 135년 만에. 깊어가는 파리의 밤공기 속에 갑자기 시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파리를 디딘 수십만 또는 수백만 한국인들의 발자국들에 담긴 시간을 모두 합친 무게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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