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졸업장 3기로 육사를 졸업한 김일수 졸업장
박만순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최능진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독립운동가다.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연루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른다. 해방 후에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치안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소련과 북조선로동당과의 갈등으로 월남하게 됐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된 그는 1946년 조병옥의 친일 경찰 등용과 부패에 항의하다가 경찰 간부직에서 밀려났다. 친일파를 청산시키기는커녕 친일파를 육성하고 비호하는 이승만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인 동대문갑구(甲區)에서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우익단체 및 경찰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승만을 무투표로 당선시키기 위한 전략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동대문경찰서의 날조로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 2일 전인 1950년 5월 8일 그의 후보등록을 취소시켰다. 결국 이승만은 무투표로 당선되었고, 이승만과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최능진은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서재필을 지지해, 이승만의 분노를 더욱 샀고, 1948년 10월 조작된 '혁명의용군사건'으로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한국전쟁 직후 북한군에 의해 형무소 옥문이 개방되어 풀려났다.
그는 북한군 점령 시절 서울에서 '즉각 정전', '평화협상을 통한 통일'을 주장하며, '평화호소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반대로 인해 위 행사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1950년 9월 말 수복한 대한민국 정부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최능진을 검거했다. 결국 최능진은 적에게 이로운 행동을 했다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1월 20일의 일이다.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초고속으로 이루어져 선고 20여일 만인 1951년 2월 11일 형이 집행되었다.
최능진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은 불법이었음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밝혀졌다(진실화해위원회, 「최능진의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 『2009년 하반기 보고서』)
또한 대법원에서도 2016년 최능진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사건에 대해 재심을 실시해, 무죄 결정을 내렸다.
1948년의 혁명의용군 사건 역시 조작혐의가 짙다. 위 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오동기 소령은 불구속 입건되었고, 서세충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김일성과 합작하여 공산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사건치고는 너무나 싱거운 결론이었다.
김일수가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된 것 같지는 않다. 이 사건 발생시기와 김일수가 파면된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이후 군내 좌익세력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숙군을 실시했다. 당시 군병력의 10%인 4700명이 그 제물이 되었다.
김일수 역시 이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김일수가 최능진과 어느 정도의 교유관계인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김일수가 당시 어느 정도의 실정법을 위반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죽을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면이 거론되었고, 공주형무소에서 김일수가 석방될 꿈을 꾸었던 것이다.
불갑산으로 피난 못 간 게 다행
큰 아들은 빨갱이로 몰려 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군·경에게 학살되었고, 아버지와 작은 아들은 군인가족이라고 반동으로 몰려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김만수 가족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남쪽으로 후퇴했다가 수복한 군인들은 김만수 가족이 거주하고 있던 전남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 약 30호 가옥을 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북한군 패잔병과 빨치산이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다만 노인들 집과 임산부 집은 예외였다.
겨울 난리에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불갑산으로 피난을 갔다. 불갑산은 전남 함평군, 장성군, 영광군에 인접한 곳으로 빨치산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기도 했다. 11사단 20연대 5중대는 빨치산을 토벌한다며 1951년 2월 20일 일명 '대보름작전'을 개시했다. 함평군의 해보·나산·신광면, 장성군의 삼서·삼계면, 영광군의 묘량·불갑면 등 7개면에서 출발해 불갑산을 싹쓸이한 것이다. 이 와중에 불갑산에 있던 민간인 1천여 명이 빨갱이로 몰려 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
그런데 김만수 가족은 불갑산으로 피난을 가지도 못했다. 소위 '반동집안'으로 몰려서였다.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오히려 불갑산으로 피난을 가지 못해서 집단학살의 화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유언
▲김만수 증언자 김만수
박만순
전쟁의 상처는 오랜 기간 김만수 가족을 괴롭혔다. 김만수는 전남대학교 재학시절 ROTC에 신청서를 냈지만 낙마했다. 그 이유를 추적하던 끝에 큰형 김일수의 행적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넷째 매형이 장성군 공무원으로 근무했는데, 신원조회 관련 문서를 보고 사정을 파악한 것이다.
1998년 어머니가 작고하면서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큰 아들 일수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이 그것이다. 공식적인 유언은 아니었지만 셋째 아들 김만수는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마음에 간직했던 형의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의지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타올랐다. 2007년 계룡대와 육군사관학교, 국가기록원을 찾아가 형에 대한 모든 기록을 추적했다. 국가가 할 일을 개인이 찾아 나선 것이다. 덕분에 큰 형 김일수가 왜 죽었는지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김일수가 정확히 어떤 이유로 군 장교에서 파면되고 구속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명확히 밝혀져야 김일수에 대한 진실규명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일수에 대한 온전한 진실규명, 이는 국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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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민저널리즘부 박정훈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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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로 몰려 죽은 장교 '큰형', 육군 가족이라 죽은 '작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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