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는 여자나 입는 것"이라는 조카에게 하고픈 말

[서평]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등록 2018.11.09 19:43수정 2018.11.0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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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난 남자 조카는 고모가 준비한 백설 공주 의상을 강력히 거부했다. 치마는 여자나 입는 것이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제 손으로 머리띠를 했고, 재미 삼아 볼 터치를 해주면 신이 나서 좋아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이전과 다른 듯하다. 뭐랄까, 조금 터프해졌다고나 할까.

자연스러운 사회화 과정일 것이다. 아무리 관습적인 남녀 구분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해도 자신이 엄마와 다름을 인지했을 테고, 아빠가 한 번도 입지 않는 치마 같은 건 입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무형의 사회적 메시지들이 아이의 성장과 함께할 것이다.    


부디 사회에 널린 폭력성은 아이를 비껴갔으면 한다. 혐오와 차별만큼은 아이가 맞닥뜨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아이가 살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이 못난 고모가 그런 세상을 만들 순 있을 것 같지 않으니 낭만적 기원을 해볼 뿐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책표지 ⓒ 창비

 
한동안 뜨겁게 떠올랐던 '맨스플레인(man+explain)', 그 단어의 창시자가 아니지만 그 말이 널리 퍼지는데 기여한 사람이 바로 리베카 솔닛이다. 너무도 유명한 그녀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이제야 읽게 됐다. 뒷북인 감이 있지만, 여전히 유효한 그녀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나는 책을 펼치며 정곡을 찌르지만 웃을 수 있는 발랄함을 기대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하며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설명하는 우스꽝스러운 일화 같은 것. 책은 내 기대처럼 시작했다. 그러나 결론은 강간과 살인 이야기로 끝난다. 저자 역시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도 이 전개에 놀랐음을 밝힌다. 그녀의 통찰이 문제의 핵심을 파고든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31쪽)

이것은 젠더 문제다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6.2분마다 한 번씩 경찰에 강간이 신고되고,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은 강간을 경험하며, 매년 8만 7000건 넘는 강간이 벌어진다고 한다. 9초마다 한 번씩 여자가 구타당하고, 남자들이 배우자나 옛 배우자를 살해하는 숫자는 매일 약 세 명, 매년 1000건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저자는 거듭 말한다.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거의 전부 남자이기는 해도, 그렇다고 모든 남자가 폭력적이란 말은 아니라고.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며, 남자들 역시 폭력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역시 주로 '남자'가 가하는 폭력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원인을 찾는다. 좋지 않은 경기, 빈부 차이, 정신적 문제 혹은 약물 중독 등. 그러나 유독 한쪽 성이 대부분의 폭력을 행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저자는 이 '폭력의 유행병'이 젠더 문제임을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남성성에 대해서, 남성의 역할에 대해서, 나아가 가부장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봐야 함을 주장한다.
 
"대체 남성성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사람들이 남성다움을 상상하는 방식, 남성의 어떤 특질을 칭송하고 장려하는 방식, 소년들에게 폭력이 전수되는 방식에는 뭔가 고심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59쪽)

저자가 인용한 T.M.루어먼의 말에 따르면, 인도의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집 청소를 하라는 환청을, 미국의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환청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곧, 정신이상과 폭력에도 문화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수시로 접하는 폭력 사건 앞에서, 우리의 문화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여다봐야만 한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폭력이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폭력은 자신에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이 각인된 남성들은 여성들을 침묵시키기에 이른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분명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15쪽)

불편함은 변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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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여성들이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음을 설명한다. 하나는 각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 또 하나는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 ⓒ unsplash

 
저자는 여성들이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음을 설명한다. 하나는 각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 또 하나는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 

저자는 작가 마리 시어(Marie Shear)의 말을 인용하며 페미니즘을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라고 정의한다. 이어지는 문장을 읽으며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이 개념은 여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지만, 점점 더 확산되고는 있다." (225쪽)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낙관한다. 아래 문장은 미국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적용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투쟁은 지루하고 험난하고 때로 추악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역공도 여전히 야만적이고 강력하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이기지 못한다. 세상은 엄청나게 바뀌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애도와 성찰과 대화를 나누었던 그 주말, 우리는 변화가 벌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200~201쪽)

나 역시 상황을 낙관해본다. 여전히 남녀를 불문하고 페미니즘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역시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이 불편함은 변화의 시작일 것이다.  

주제넘게 바라건대, 나는 일곱 살 난 조카가 다른 건 몰라도 페미니스트로 자랐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하나의 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쪽의 권리를 뺏어 다른 한쪽에게 주는 것이 아닌, 모두의 해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속박 없이 보다 더 자유롭게, 모두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2015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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