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퀘이커의 북한 방문기

나는 조국을 방문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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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수(sydney)등록 2018.11.12 16:21
나는 조국을 방문한 것이 아니다.
-호주 퀘이커의 북한 방문기-
 
(예상치 않았던 사고 편)
 
아래 글의 '나'는 내가 아니고 내 친구 'P 교수'이다.
그럼 'P 교수'는 누구냐? 그는 하버드 대학 사회학 박사 출신으로 호주의 아델라이드 대학의 은퇴교수이다. 더군다나 그의 집안은 한국 근대사에 기록될만한 가치가 있는 족보가 있는 집안이다. 외조부인 일제강점기 금광왕으로 알려진 이종만은 남한 자본가 출신으로 유일하게 북한 혁명열사능에 묻힌 월북인사이다. 그런 연고로 그는 지난 해 북한을 두 번 방문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쓰기로 한 것은 성실, 꼼꼼, 철저, 정확하기만 해서 도무지 재미라고는 찾아 볼래야 찾을 수가 없는 그가 매우 재미 있는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0월에 호주의 전국에서 모은 백인들 12명을 인솔하고 북한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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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 차례 총 3 주간의 북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달인 7월에 마침 호주 퀘이커의 전국대회가 내가 살고 있는 애들레이드에서 열리게 되었다. (여기서 퀘이커가 먹는 것인지 입는 것인지 모를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퀘이커는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종교 형태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형식 없이 단순히 둘러앉아서 1 시간 동안 어금니 꽉 다물고 있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의 종교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아무런 형식,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원가 0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숫자가 매우 적어 한국에는 불과 몇 백 명, 호주는 2,000명 정도 된다.)  
내가 퀘이커 전국대회에서 북한에 대한 발표를 하자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였고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고 싸인을 한 사람이 15명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당국에서는 호주 퀘이커에 의한 평화사절단 방식의 방문을 원했으나 적당히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호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퀘이커의 전국조직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에 평화사절단이라는 이름을 내 걸 수 없다는 것이다. 나도 미국 퀘이커의 북한과의 관계를 모델로 보고 호주 퀘이커도 하나의 NGO로서 북한과의 장기적인 신뢰관계를 맺는 준비단계의 방문으로 만들고 싶었지 단순히 북한 관광을 알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미국 퀘이커 봉사활동부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는 약 15년 전부터 북한의 몇몇 협동농장과 관계를 맺고, 북미간에 정치적인 관계가 어떻게 변하든 꾸준히 농장 지원의 프로그램을 꾸려갔다. 호주 퀘이커는 반드시 농업 전문이나 농장과의 관계 만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고 협조적인 관계를 만들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말하자면 북한과 호주 NGO사이에 정부가 하려고 하지 않는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북한 당국에 메일을 보내면 몇 달이고 북측에서 답이 없는 때도 있었고 처음에는 관심을 보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른 계획이 생겨서 숫자가 하나 둘 줄어서 4명까지 줄어들었다.
 
호주 퀘이커 그룹의 북한 방문의 계획은 느리게 진전되어 해를 넘겨 2018년 7월에 시드니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또 다시 북한에 대해 발표를 했더니 가겠다는 희망자가 다시 늘어 10명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의 반대로 못 가겠다는 사람도 나와서 결국 12명이 가게 되었다. 준비를 위하여 호주 전국에 퍼져 있는 친우들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메일 문답이 있었고 약 7 번 정도의 화상 통화 회의를 했다.
논의를 거듭 하다 보니 북한 정권에 대한 두려움이 공통점이었다. 내가 아무리 북한이 남한만큼이나, 아니면 남한보다도 안전한 곳이라고 해도, 그걸 받아드리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평화주의자인 퀘이커라도 북한 여행을 하겠다는 사람은 상당한 마음의 장애물 넘기가 필요했다.
사실은 북한 여행은 안내원들의 완전한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중국보다 위험이 적다. 의료 면에서만 보더라도 최신식의 장비들을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기본 치료를 위해 있는 것은 다 있을 것이기 때문에 웬만한 발전도상국에 여행을 하는 것 보다는 의료치료에 면에서는 북한이 훨씬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기본적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또 스마트 폰이나 랩톱을 가져가면 그 내용까지도 다 조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여 스마트폰을 두고 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북한에 갔다가 인도에 갈 사람은 북한에 랩톱을 가지고 들어가기를 두려워했다. 랩톱을 중국이나 인도에는 가지고 가도 북한에 가져가기는 무서워하고 랩톱의 내용에 문제가 있어 랩톱을 압수 당할까봐 두려워하니 답답했다.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선양의 호텔에 맡기고 가면 어떨까 라고 해서 호텔이 그렇게 해 줄지는 나도 모르겠으니 가서 물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또 호텔 방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다 도청하고 있어서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내 답변이 퀘이커 친우들의 마음의 장벽을 어느 정도 낮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가서 자신이 경험하고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북한에 가자면 중국을 통해 가야해 중국 방문 비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중국을 단지 경유해서 다른 나라에 가겠다는 여행객의 숫자가 늘어가자 중국에서는 72시간 비자 프리 트란짓이라는 정책을 시작하였다. 이 정책은 몇 개의 지정된 국제공항을 경유하는 경우에만 쓰인다. 선양, 베이징, 상해, 광죠우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72시간이라면 비자 없이 2박 3일의 관광도 가능하다. 우리의 경우에는 베이징이 아니라 선양에서 고려항공을 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각각 자기가 사는 도시에서 출발하여 10월 13일 토요일에 선양 공항에서 모이기로 하되, 어떤 이는 몇 일 일찍 가서 관광도 하고, 어떤 이는 마지막 날에 도착하여 호텔에 묵을 필요가 없게 계획하는 등, 각자가 72시간 무비자 트랜짓 정책을 활용하는 계획을 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국의 항공회사직원들도 무비자 트랜짓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12명 모두가 출발지에서부터 비자 때문에 고생 고생을 한 끝에 드디어 평양행 비행기를 타기 2 시간 전에야 모두 모여서 겨우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선양에서 평양까지의 항공시간은 약 1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작년에 탔던 비행기 보다 더 커서 한 줄에 중앙의 복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2석, 오른 쪽에 2석으로, 총 4석인 작은 비행기였는데, 이번에는 총 6석이고 비행기도 더 길었다. 좌석이 가득 찾는데 북한 사람들이 제일 많고, 중국인들, 백인들 순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모두 어마 어마한 양의 짐을 가지고 북한으로 돌아가는데 대부분 중국서 뭔가를 사기지고 가는 모양이다. 70-80년대의 북미행 대한항공에서처럼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것 같이 보인다. 통제사회인 북한에서 비행기 여행을 통한 보따리 장사가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평양 비행장에 도착하여 통관을 할 때 북한 사람들은 그 많은 짐을 문제없이 다 통과시키는 것을보면서도 우리 일행 중에는 노트북 컴퓨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한 사람도 있었지만 전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책을 가져 온 어떤 이에게는 그 책을 공항에 맡기고 가라고 했다가 또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하여간 북한도 바뀌고 있어서 공항의 세관 직원들도 반드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모르는 듯했다.
안내원 3 명이 기다리고 있던 버스로 도착한 호텔은 스케줄에 나온 평양호텔이 아니라 더 고급스러운 고려 호텔이었다. 고려 호텔은 북한으로 보아서는 최고급 4 스타 호텔일 텐데, 국제적으로 보면 3스타 정도일 것이다.
방을 배당 받아 들어갔더니 당장 마실 물이 없었다. 1, 2 등실에는 물이 있는데, 3등실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작년에 경험한 평양호텔은 고려호텔보다 등급이 낮을 것 같은데 매일 물을 두 병씩 가져다 놓았다. 결국 방에 물이 없으니 모두가 식당에서 식사가 끝나면 새 물병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방의 온도는 약 25도로 되어있는데, 이 온도는 호주사람들에게는 너무 높은 온도였다. 나는 온도를 내리는 방법을 찾았는데 방법을 찾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더워서 창문을 열고 지냈다고 한다.
작년에 묵었던 평양호텔이나 양각도 호텔에 비해 이번의 고려호텔에서는 TV 채널들이 많았다. 중국 채널들은 여러 개였고,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여러 나라의 채널이 있는데 일본의 NHK까지 들어오고 한 채널에서는 구 동독의 드라마 같은데, 조선어로 더빙한 것이 나와서 놀랐다.
일행이 12 명이니 방이 더블로 6 개일 것으로 더블이 5 이고, 싱글이 2 이라고 했다. 모두가 서로 짝을 지으니 싱글로 온 나와 윌마라는 여성이 남는다. 만약에 더블룸이 6 이었다면 나는 윌마와 방을 같이 써야 하는 총체적 난국에 처할 뻔 했는데 싱글룸을 얻어서 나도 윌마도 피차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그런데 내 방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은 모두 20 층 이상의 높이에 있는 자기들 방에 올라가고 나만 1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데 안내원이 금강산 국제여행사 사장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호텔 일층의 커피 집에서 여행사 사장을 만났는데 사장은 호주 퀘이커가 얼마만큼 북한의 농장이나 농업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는지 있다면 어느 협동농장을 지정해줄 수도 있다고 했다. 사장은 나의 신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물었는데 내가 호주 퀘이커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를 대표로 취급하는 듯했다.
30 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안내원 동무가 와서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1층 로비에 소파들이 있는 쪽으로 갔더니 윌마가 머리에 손수건 같은 것으로 피를 막고 있는데 작아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빨리 내 가방 속의 중간 사이즈 타올을 꺼내어 주었는데 그 수건도 빨리 빨개져서 모두가 놀라서 당황하고 있다. 호텔의 직원은 호텔의 간호실로 데려가자고 하고 퀘이커 여성들은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며 거의 다투고 있다. 호텔 직원은 호텔에도 의사가 있으니, 우선 호텔 간호실로 가서 응급치료를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그러기로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호텔 간호실로 간다는데 투윈 타워의 다른 타워의 엘러베이터를 타고 20 몇 층인가로 올라간다. 올라가 보니 호텔 간호실이라는 곳이 다른 호텔 방과 똑 같은 방이고 전혀 간호실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급 호텔에 제대로 된 간호실이 없다는 것은 예상 외였다. 그러나 몇 분 후에 의사라는 사람이 와서 머리에 상처를 조금 검사하더니 상처가 커서 병원에 가야 하겠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내가 준 중형 사이즈 (100 x 30 cm)의 타올이 피로 다 졌어서, 호텔 타올을 쓰자고 했더니, 놀랍게도 그 층의 호텔 직원이 호텔에 코스트가 생긴다는 이유로 주저했다.
세상에! 사람이, 더군다나, 호텔의 손님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타올 하나에 신경을 쓰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타올이 보이는데도 쓰게 하려 하지 않아서 내가 가지고 다니던 아주 작은 (25 x 25cm) 손수건을 또 꺼내주었다.
병원에 윌마를 데리고 가기로 하고 나와 오 동무, 그리고 퀘이커 여성 수가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런데 엠불란스가 아니라도, 최소한 택시 정도로는 갈 줄 알았는데, 우리를 공항에서 태우고 온  50인용 대형 버스를 타고 간다. 길도 안 좋고 시간도 6시 반 정도여서 평양의 러시아워라 느렸다. 처음으로 평양에 차가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윌마는 피로 젖은 수건으로 머리의 상처 난 부분을 계속 누르고 있는데 힘이 들어 수에게 대신 누르고 있어 달라고 한다. 수가 대신 누르려고 하는데, 남의 몸을 어느 정도 눌러야 되는지 모르니, 너무 눌러서 아프다는 둥, 너무 적게 눌러서 피가 나온다는 둥, 윌마가 불평이 많았다.
30분 정도 왔는데도 병원이 나올 만한 지역이 아닌 주택가를 달렸다. 운전 기사도 길을 몰라 오동무가 계속 전화로 묻고 운전 기사 동무에게 설명을 하면서 가는 것을 보니 병원이 누구나 아는 병원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알게 된 <평양친선병원>은 평양의 외교관 구역에 있는 외국인 전용 병원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가본 적이 없어서 전화로 물어서 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버스를 여러 번 세우고 길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서 가는 것이다.
드디어 입구에 보초가 서 있는 고급주택가처럼 보이는 구역으로 들어가서 오 동무가 신분증을 보이고 길을 물었다. 보초는 계속 이 길로 가다 보면 뭐가 나오는데, 거기서 어디로 가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그런데 대형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 아닌 길로 한참 가더니 "아, 너무 온 것 같다." 하더니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버스를 돌릴 수가 없어서 몇 십 미터를 후진해서 병원이 나오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끔 적십자 싸인이 있기는 있는데 충분하지가 않아서 찾기가 힘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친선병원에 도착했지만 저녁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다. 소련 스타일에 학교같아 보이는 약 50미터 정도의 길이의 건물이었다. 50대의 남자의사와 40대의 여자 간호사가 윌마를 치료했다. 윌마의 머리의 상처는 그 동안 수건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피가 나오던 것은 멈추어 있었다. 그런데 피가 흐르던 곳 주변에 피가 말라서 머리카락이 떡처럼 붙어있었다. 의사는 우선 소독액으로 상처 근처의 마른 피를 닦아내며, 필요한 곳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점점 머리가 찢어진 부분의 속까지 닦아냈다. 머리의 오른 쪽 뒤의 부분에 약 3센치의 길이가 찢어졌다고 한다. 상처 속에 고여 응고한 피도 씻어낼 수 있는 한 씻어내고 찢어진 곳을 3 바늘을 꿰메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마취도 하지 않고 꿰메는 것이 아닌가? 머리의 상처를 3 바늘 꿰메는데 마취를 하지 않고 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옆 방에서 윌마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고문을 받는 소리 같았지만 좌우간 치료는 무사히 끝났다.
나중에 호주에 돌아와서 안 이야기이지만 북한에서 석방되고 와서 사망한 미국인 청년 웜비어가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치료를 했으니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어도 웜비어가 살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웜비어 만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 목사도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윌마는 1947년 생인데 아직도 아주 여러 가지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활달한 여성이다. 독서 그룹에서 북한에 관한 소설을 읽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번에도 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뭐든지 의견이 강하고, 아주 말을 하기를 좋아해서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뭐든지 말해버리는 타입이다.
문제는 말도 안 통하는 친선병원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에도 의사가 자기에게 뭐를 하고 있는가를 계속 물어서 알아야만 마음이 안정이 되는 타입이라는 것이다. 의사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치료하는 타입이고, 윌마는 '의사가 알아서 하겠지.'가 아니라, 의사가 뭐를 하는지 알아야 하고, 직접 의사가 설명을 못하니, 통역에게 물어, 통역이 의사에게 묻고, 의사가 답을 하면, 또 통역이 설명을 해야 하고, 그러면 그 말을 듣고, 또 자기도 그 말에 대해 뭔가 자기 표현을 말로 하고 싶어했다. 그러자니 치료를 하고 있는데 머리를 자꾸 움직이게 된다. 그러자 의사는 계속 말을 하지 말고, 고개를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상상해 보라! 평양 교외의 병원에서 한 밤중에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를!
 
하여간에 첫 날의 병원에서의 치료는 이렇게 끝나고 약을 받아왔다. 그 중에는 호텔로 돌아가면 호텔의 의사로부터 닝겔주사를 매일 맞는 계획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 병원에 일찍 오고 매일 오라고 했다. 첫 날 치료는 비교적으로 성공이었고, 결과는 더 기다려 보아야 하겠지만 우선은 좋은 편이었다.
이제 윌마의 치료보다 관광에서 빠지게 되는 것과 윌마의 사고로 그룹 전체의 여행계획에의 영향에 대하여 걱정을 해야 했다.
 
병원에서 호텔로 돌아오자 밤 11시 경이 되었는데, 윌마와 수는 같이 호텔 방으로 식사를 가져와서 하기로 했다. 돌아왔더니 남자 안내동무 둘이 식사를 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둘 만이 아니라 여행사 사장도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어서 넷은 밤 11시에 고려 호텔 제일 꼭대기  회전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나와 식사를 같이 해 주기 위해 3 사람이 나를 기다려 준 것은 상당한 대우였던 것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나는 윌마 일로 충격을 받아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다음 날 일정에는 판문점과 개성에 가기로 되어있었지만 나는 윌마와 병원에 가기로 해서 일행은 판문점으로 가고 우리는 택시로 병원에 갔다. 영어를 하는 안내 동무가 같이 갈 수도 있지만 윌마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내가 같이 가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전 날보다 훨씬 간단했다. 상처를 꿰맨 곳의 실을 푸는 것은 보통은 10일 정도 후에 하는 것이잠 일주일도 안 되는 출국 하루 전인 금요일에 풀자고 하였다.
 
병원에서 호텔로 돌아 오니 약 오전 11시 정도가 되었다. 윌마는 머리에 미이라처럼 붕대를 감고 있어서 사람들의 주목거리였으나, 전혀 상관하지 않고 다녔다. 12시에는 나는 윌마와 둘 만이서 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어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두 시간 이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니 식당 메니저가 와서 다음 코스를 위해 준비해야 하니 자리를 옮겨 달라고 해서 윌마는 호텔 의사를 보러 가고 나는 할 일이 없어서 새로 온 안내 동무에게 물었다.
"호텔 밖을 걷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방에서 푹 쉬시지요."
"외국에서 돈을 들여 조선을 보러 왔는데 대낮에 방에서 쉬라구요? 내가 혼자 나가도 되니 주위를 좀 돌다 오겠습니다."
"길을 잃거나 하시면 위험합네다."
" 나는 세계의 5 나라에 5년 이상씩 살았고, 수십 개의 도시를 여행했고, 중국어도 하지 못하면서 중국 도시들을 여러 곳 혼자서 여행했는데, 조선 말이 통하는 이 곳에서 호텔 밖에서 길을 잃을 리가 없지요. 그러면 북에서는 여행객이 혼자 다닐 자유가 없다는 것이군요."
안내원은 "아니, 그기 아니라요." 하며 몹씨 당황해 했다.
"호주에 돌아가면 이런 일에 대해서 글을 써야겠습니다."
"그러시면 곤란 합네다. 내래 원래 안내원이 아니라서 잘 모르갔습니다. 오늘 갑자기 부탁이 와서 나오게 되었습네다. "
약 27 살 정도로 보이는 영화배우 같인 잘 생긴 안내원에게 다시 물었다.
"대학에서는 전공을 뭘 했어요?"
"조선 혁명사를 전공 했습네다."
"그게 지금 하는 일에 도움이 됩니까?"
"기럼요. 누구나 다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님네까?"
이야기가 점점 서로에 대한 호감이 생기는 방향으로 진전이 된다.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은퇴 했다고 하니 자기 아버지도 대학에서 가르친다고 한다. 다음에 조국 방문 하실 때는 꼭 자기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이름을 적어놓은 종이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남한을 모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북한을 조국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5 나라를 살아 온 한국말을 하는 세계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내원들에 대하여 설명을 해야겠다. 안내원들은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북한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교육을 받아, 지식만이 아니라, 사상무장의 수준도 높아야 할 것이다. 짐작하건데 사회적 지위를 따져본다면 상층 20-30%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방문객 입장에서는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로서 북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안내원들 사이에서 북미를 포함한 유럽계통 서양인을 상대로 일한 경험이 있는 안내원들과 경험이 없는 안내원들의 차이가 크다. 북한에서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크게 해외동포와 외국인으로 구분하는데 외국인들은 또 두 가지로 나눈다. 아시안과 유럽계의 백인들이다. 조선어를 하는 해외동포의 경우에는 해외동포위원회 (해동)가 맡고 그 외의 외국인들은 국제관광여행사가 맡는다. 이번 일행을 맞이한 회사는 <금강산 국제려행사>라는 회사인데 이제까지는 주로 아시아 국가, 주로 중국에서의 관광객을 맞이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영어를 하는 외국인 그룹을 맞는다고 했다.
우리 팀은 영어 안내원 Mr 오와 Miss 김과 영어를 못하는 고 과장이 안내를 맡았다.  고 과장은 다른 두 안내원들을 감독해서 그룹을 인솔하는 내 입장에서 중요한 사안은 고과장과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나 고 과장의 스타일은 해외 교포를 다루는 조선어 안내원의 타입이었다.
통역들은 서양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동, 말, 생각에 있어서 공식적이지 않아서 쉽게 친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해외 교포들에게처럼 '조국 방문'이나 '우리 민족'의 공통점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Mr 오는 나의 아이폰이 유난히 크게 보이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나의 아이폰은 7플러스였는데, 전화 케이스용 파우워뱅크를 끼워서 전화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또 내가 가끔 cordless bluetooth headset을 귀에 꽂고 있으면 그건 뭐 하는 건가, 등 전자 부속품에 호기심을 많이 보였다.
25 세 정도의 Miss 김은 영어가 유창하고 분위기가 전혀 북한의 모범생들 같은 안내원 스타일이 아니고 호주에서 보는 젊은 동양 여성 같은 분위기이었다. 동시 통역을 하는데 그 스피드는 영어 세계에서 오래 살아온 나도 따라가지 못하는 스피드이었다. 일행 여자들과 많이 이야기를 하느라고 나와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통역 보다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쪽이 돈이 더 되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에서 여러 번 영어 노래를 불렀는데, 나보다 영어노래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과거에 보아온 안내원과는 달리 특별히 관광객들에게 전혀 북한을 좋게 보이려고 일부러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밖으로 못나가게 하니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사고가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 자세한 경위를 알기 위해서 윌마의 방으로 찾아갔다.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 책임의 소지가 어디에 있는가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잘못은 사진을 찍으러 탁자에 올라간 윌마에게 있다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윌마에 의하면 탁자 위에 올라선 것은 전혀 아니고, 창문에서 밖의 사진을 찍은 후에 방안 쪽으로 걸어 오는데 방 바닥이 편편하지 않고 높이가 다른 곳이 있었는데 그걸 보지 못해 넘어져서 탁자의 모서리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호주에서라면 모든 책임이 완전히 호텔에 있어서 보상까지 받을 수 있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북한에서는 그런 안전의식이나 책임의식 조차 없었다. 그 날 이후로 호텔에 다른 곳을 주의하여 관찰해보니 호텔의 여기 저기에 작은 스텝이 보이는데 주의하라는 말이 쓰여있지 않다. 그 때부터 우리 사이에서는 "저기 또 윌마가 있으니 조심해." 하는 말이 생겼다.
 
다음 날에는 윌마와 병원에 가는 것은 오 동무에게 맡기고 나는 일행과 같이 다닐 수가 있었다. 그런데 윌마가 관광에 빠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고 고 과장이 셋 째 날부터는 스케줄을 조정했다. 가능한 한 일찍 윌마가 병원으로 가고 일행이 버스로 병원에 가서 윌마를 데리고 가는 방식으로 했다. 고 과장이 전혀 생각도 못했던 융통성을 발휘해서 일행은 모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윌마의 사고는 처음에는 위기처럼 보였고 그것 때문에 우리 모두의 여행 계획에 큰 타격이 있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오히려 생각치 못했던 북한 사회에서의 실정을 보게 되었다.
나흘에 걸쳐 치료를 받고 약값을 포함한 총 치료 비용은 총 132불이었다. 호주에서라면 총 비용이 4, 5배 정도 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재정성 발행의 '외화 령수증'을 받았는데 비록 손으로 쓰지만 그 관리가 전산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위조로 발행하지 못하게 종이 안에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영수증을 그렇게 신중하게 만든 것을 보면 사기 방지를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북한 사회에서 그런 짓이 가능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원래 이번 우리의 북한여행은 다른 일반적인 관광여행과 달라서 2017년 9월에 있었던 미국의 노동조합의 소위 '평화사절단' 여행 스케줄에 준해서 정해졌다. 우리가 미국 퀘이커처럼 농장에 관심을 보였더니 북한의 농업성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 모양이다.
또 한 가지 기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포함된 것은 지금은 '빛나는 조국'이라고 이름이 바뀐, 과거의 '아리랑 마스게임'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다행히 우리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빛나는 조국' 마스게임이 연장공연을 하고 있어서 참관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비용은 따로 더 내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보겠다고 했다.
 
To be continue…..

(사진 자료는 페이스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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