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4년 3월 9일 유용태, 홍사덕 외 157인의 의원이 서명발의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민주당 박준 원내행정실장(왼쪽)이 의사국장에게 제출하고 있다.
이종호
집권 초기부터 노무현 정부의 개혁정책은 야당과 보수언론에 발목이 잡히고, 출범 2년여 만인 2004년 한나라당과 잔류 민주당 의원들에 의해 헌정사상 초유의 헌재에 탄핵소추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탄핵소추안이 헌재에서 심의 중일 때에 실시된 제17대 총선에서 국민은 여당에 과반수 의석을 보내주었다.
국민의 힘으로 탄핵소추가 거부되면서 헌재도 소추안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혁신정책으로 '4대개혁입법'을 추진했으나 다수 여당의 무능과 기득권세력의 완강한 저항으로 쉽지 않았다.
노무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신행정수도 건설로 전국의 균형발전, '대연정'을 통해 지역주의 극복, 평화ㆍ자주 외교정책 등을 실시하고자 했으나 그때마다 보수세력에 발목이 잡혔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재산국가귀속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과거사 청산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 제주 4.3평화공원에서 4.3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였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화해 협력을 이어받아 2007년 10월 2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땅을 밟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에 이어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 백두산 - 서울 직항로 개설 등에 합의했다. 무엇보다 돈 안 쓰는 선거, 투명한 선거풍토를 조성한 것은 그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미공개 사진] 청와대에서 노사모 회원들과 비공식 면담 도중 '해준 것도 없는데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며 눈물을 흘리는 노무현 대통령. (2006.8.27)](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9/0527/IE001059274_STD.jpg)
▲ [미공개 사진] 청와대에서 노사모 회원들과 비공식 면담 도중 '해준 것도 없는데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며 눈물을 흘리는 노무현 대통령. (2006.8.27)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제공
경제 정책에도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수출 3000억 달러, 연평균 경제성장률 4.3퍼센트,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의 성장을 이루었다. 외환보유액은 김영삼 정부에서 외환위기를 겪을 때 37억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김대중 정부 임기 말에 1,214억 달러로 증가하고, 노무현 정부 출범 4년 만에 2,400억 달러를 기록함으로써 중국ㆍ일본ㆍ러시아ㆍ타이완과 더불어 세계 5대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보수세력은 '잃어버린 10년' 타령을 멈추지 않았다.
실책도 적지 않았다. 대북송금특검 실시, 한미FTA 졸속 추진, 이라크 파병 등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른바 '4대악법' 개폐는 원내 다수당이 되고도 전략미숙 등으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실정으로 꼽혔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무현 죽이기'가 시작되었다. 퇴임 후 고향 봉하마을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하던 그에게 검찰ㆍ감사원ㆍ국세청ㆍ금융감독원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되어 주변을 수사하고, 서울에서 반이명박 촛불집회가 시작되자 배후를 노무현 쪽으로 의심한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 2008년 10월 18일. 화포천 주변에 있는 농지를 둘러보다 만난 농민과 함께 앉아 얘기를 나누는 대통령님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수구세력의 노무현 죽이기는 노무현을 파렴치범으로 그의 정치적 부활을 막으려는데 초점이 모아졌다. 오랜 지인의 회사 태광실업이 세무조사를 받고, 그의 고교동창ㆍ친인척ㆍ청와대 수석 등이 속속 체포되었다. 수구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피의사실'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도덕적 살인행위였다.
수구신문의 '노무현 죽이기'는 집요했다.
신문은 1면 머리기사로부터 사설ㆍ칼럼 등에서 노무현에 대한 비난ㆍ조롱ㆍ막말ㆍ저주로 도배질하고 사장이 바뀐 방송들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다져놓은 민주ㆍ평화ㆍ통일ㆍ공정의 초석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기득권세력이 들어섰다.
수구신문이 '노무현 죽이기'의 공범이라면 이명박 검찰은 주범이었다. 검찰은 언론플레이를 통해 노무현 일가가 "수십억 원을 챙겼다"는 혐의를 흘렸지만 당시 노무현은 자신의 집에 온 '진보주의 연구 모임' 학자들에게 차비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무현은 마침내 검찰 소환 조사를 받게 되면서 도덕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망신보다 추구했던 진보적 가치가 훼손되고 조롱당하는 것에 더욱 견딜 수 없었다.

▲ 노무현 대통령 서거 둘째날, 봉하마을 현장
이윤기
그리고 결단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순결성을, 진보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2007년 5월 23일 새벽, 고향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날렸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노무현의 서거 소식은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몰고 왔다. 전국에서 추모의 물결이 흘러넘쳤다. 촛불 집회가 열리고 전국 각지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보도는 그의 서거와 관련 정곡을 찔렀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이명박 정권의 '몰이사냥'을 견디지 못한 선택이었다. 촛불에 덴 정권이 그를 배후로 의심해 정치적 보복에 나섰고, 그 하수인인 검찰은 내부에서조차 범죄성립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무리한 수사를 감행했다. 보수언론은 여과없이 혐의사실을 공표하여 그를 구석으로 밀어 붙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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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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