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11월 12일(현지시각)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및 남미 3개국 방문을 위해 출국한 노무현 대통령이 첫 기착지인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 미국의 민간 외교정책단체인 국제문제협의회(WAC)가 주최하는 오찬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 이후 미국과 양국관계에 대한 첫 번째 메시지 성격의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11일 국내에서 개봉된 아담 맥케이 감독의 다큐 영화 <바이스>에서 묘사된 것처럼, 부시 행정부의 외교전략은 실제로는 딕 체니 부통령의 기획과 지휘 하에 전개됐다. 부시는 외교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이 점은 박성관 경남대 교수의 논문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과 외교정책 참모 체계의 성격: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에서도 나타난다. 박성관 교수는 "(부시는) 외교정책 경험이 부족한 개인적 배경으로 인해 편의상 외교정책 결정 과정을 참모들에게 상당히 위임하는 스타일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외교 문외한인 부시가 노무현과 회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부시 참모진은 적지 않게 긴장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노무현한테 더 이상 밀리지 말자'는 다짐 같은 것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부시는 노무현에게 다시 한 번 밀렸다. 이듬해인 2004년 11월 13일 로스앤젤레스(LA)에서였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하러 아메리카대륙을 여행하다가 LA에 들른 노무현은 미국 국제문제협의회 오찬 연설에서 "북핵 해법은 미국의 대북 위협 포기"라는 의외의 발언을 내놨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미국이 대북 압박을 포기하는 게 북핵 해법의 요체라는 이 발언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발언이 한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욱 더 그랬다. 노무현의 발언은, 7일 전 대선에서 승리해 재선 확정의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던 부시한테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로부터 7일 뒤 칠레 산티아고에서는 더 큰 일이 있었다. 한미정상회담 당시 노무현은 LA 발언의 여세를 몰아 부시를 또다시 압박했다. 그래서 얻어낸 성과가 '한국이 6자회담을 주도한다'는 점에 대한 부시의 양해였다.
6자회담은 미국의 주도 하에 중국이 중재하는 가운데서 진행됐다. 그런데 노무현은 중재권도 아닌 주도권을 획득했다. 부시한테서 주도권을 가져온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6자회담이란 배가 산으로 올라갔다고 탄식할 만한 일이었다.
2009년에 김영남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라고 선언했지만, 2004년에 이미 6자회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미국의 대북 압박을 위한 6자회담이란 배가 노무현의 구상대로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전략이 이로 인해 차질을 빚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극단적인 충돌이 생기지 않고 제2차 핵위기와 6자회담이 유야무야로 끝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노무현의 '6자회담 주도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이 6자회담을 주도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일시적으로나마 한국이 6자회담 주도권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한미관계로 보나 한국 외교 전반으로 보나 상당히 특별한 사건이었다.
부시의 '좀 유치한' 반격
그러나 부시가 항상 밀리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부시의 뒤에는 세계제국 미국이 버티고 있었다. 노무현의 개인적 역량만으로 노무현-부시 관계가 정립될 수는 없었다. 결국 부시는 6자회담 주도권을 되찾아갔다.
게다가 부시는 노무현에게 무안을 주기까지 했다.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직전인 2007년 9월, 시드니에서 노무현이 북미 종전선언 문제를 거론하자 부시는 "더 이상 어떻게 말햐느냐?"라며 자리를 떠났다.
1945년에 세계 최강이 된 뒤로 미국은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동시에 마무리하는 외교적 관행을 축적해왔다. 그런데 이 관행을 배려해주지 않고 남북한이 똑같이 '평화협정 이전에 종전선언부터 하자'고 했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는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시드니 회담 직후이긴 하지만, 2007년 10월 25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서울시립대 특강 뒤의 기자회견에서 "평화협정이 곧 종전선언을 의미한다"라고 발언한 일이 있다. 이런 데서도 나타나듯이 미국은 '우리는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강조했다. 그런데도 적대국인 북한뿐 아니라 동맹국인 한국의 대통령마저 미국의 관행을 배려해주지 않으니, 부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만도 했을 법하다.
세계 최강 미국의 관행을 배려해주지 않는 노무현에 대해, 부시는 외교적 무례를 범하는 방법으로 무안을 줬다. 자신을 압박하는 노무현에 대해, 국력을 배경으로 하는 '좀 유치한' 외교적 결례로 응수했던 것이다.
부시가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핵문제에서 노무현한테 밀린 부시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서는 노무현을 곤란한 입장에 몰아넣었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들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이라크 파병과 FTA 체결에 동의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특히 파병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국의 대북 압박을 약화시킨다는 명분 하에 미국의 요구를 들어줬다. 문재인 대통령의 회고록 <문재인의 운명>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 시종일관 '무력에 의한 대북문제 해결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천명했다. 북핵문제는 철저하게 대화를 통해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대통령 소신은 확고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끌어가기 위해선 미국 정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자면 우리도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처럼 북핵 문제에서는 부시가 밀렸지만, 이라크 문제나 FTA 문제에서는 노무현이 밀리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사안들과 관련해 노무현은 국민 여론은 물론이고 자기 소신마저 접고 부시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조지 부시와 노무현의 관계는 밀고 밀리는 힘겨루기를 했던 관계다. 애증이 중첩된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속에서 정이 생겼는지 부시는 퇴임 후에 쓴 자서전 <결정의 순간>에서 노무현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2009년에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접하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라고 기술했다고 한다.
그런 애증관계의 당사자인 조지 부시가 노무현 초상화를 들고 23일 봉하마을에 나타난다. 그의 눈에 비친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구체적 모습이 그가 건넬 초상화에서 좀더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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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sisahistory.com(오늘의주요뉴스 정리).제15회 임종국상.저서:제도밖의 권력, 영부인 리스크.아무도 몰랐던 독립운동 이야기,친일파의 굴욕,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문제인가,조선상고사,역사추리조선사,당쟁의한국사,왜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한국중국일본 그들의교과서가 가르치지않는역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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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첫 정상회담서 '부시 독트린' 접게 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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