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 미조리 함상에서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NARA
또 일부 일본 측 주장으로 미국 항공기가 기뢰를 투하했다거나 잠수함이 이를 설치했다는 기뢰 폭침설 주장도 언뜻 수긍하기 어렵다. 일본은 사고 후 책임자 처벌 및 보상 등 엄청난 비난과 후유증이 두려운 나머지 미군 기뢰 폭침으로 그 책임을 전가, 전쟁에 의한 불가피한 사건으로 덮으려는 음모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기뢰 폭침설이 맞다면 그것은 미국이 설치한 기뢰에 의한 폭발이 아니라, 어쩌면 일본이 설치한 자기들의 기뢰에 의한 실수 또는 고의 폭침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일었다. 그곳은 바로 일본 군항이 있는 깊숙한 내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이런 추측이 따르기 마련이다. 당시 일본 최고위층에서는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상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진상을 사실대로 밝히면 더 이상의 추측은 사라질 것이다.
일부 유족 측 주장은 한결같이 일본의 고의적인 폭침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고인이 된 그때 생존자들의 증언이라고 한다. 사고 그날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 내해에 이르자 본선에서 작은 구명정이 바다로 내려지고 20~30명의 일본인들이 화급히 하선해 본선을 떠난 뒤 곧장 배가 폭발해 두 동강 났다고 전한다. 이는 사전에 상부의 지시를 받은 상급자는 도망을 친 후 배가 폭파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살아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것이 두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은 '그들의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불법적 행위가 만천하에 알려지고, 그런 일들이 전범 재판에 회부될 것으로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하지만 내가 하얼빈 731부대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난징 대학살사건의 진상을 기록으로 본 바, 일본인들의 잔인 무도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에게 인권은 없었다. 더욱이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그저 통나무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일부 유족 측의 주장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교토 니조조(二條城) 앞 재일동포 식당에서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과 나란히 앉아 저녁밥을 같이 먹으면서 사제간 소주잔을 나눴다. 나는 그에게 소주잔을 건네면서 한 마디했다.
"자네가 억울한 동포들의 눈물 닦아주는 일을 꾸준히 하시게."
언제나 과묵한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민화협 김홍걸 대표상임의장이 유족들에게 눈물을 닦아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사하고 있다.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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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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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기뢰 설치? 그래서 수천 명이 침몰해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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