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녕 선생 거주지에 붙어있는 현판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 李東寧 舊居遺址)
김경준
나는 이동녕 선생을 생각하면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당신의 생애를 통해 오롯이 보여준 '쟁족(爭足: 누구나 다리가 되어 궂은 일, 힘든 일 마다하지 말자는 뜻)' 정신 때문이다.
이동녕 선생은 독립운동 경력으로 치면 김구 선생보다도 훨씬 선배였다. 선생은 일찍이 만주와 러시아를 넘나들며 무관학교 설립, 군정부 수립,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운동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임시정부의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로도 선생은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늘 '해결사' 역할을 도맡았다. 이승만 탄핵 사태, 국민대표회의 등으로 임시정부가 분열할 때마다, 공석이 된 대통령과 국무총리 자리를 대리하면서 혼란을 수습했다. 그 과정에서 국무총리, 내무총장, 군무총장, 법무총장, 국무령 등 웬만한 정부 직위는 다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33년, 자싱(가흥) 피난처에서 김구, 이동녕(가운데), 엄항섭
국사편찬위원회
그럼에도 선생은 늘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김구와 같은 능력 있는 후배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뒤에서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에 만족했다. 임시정부의 탄생을 주도했으며, 주석을 무려 네 번이나 역임했음에도 김구 선생보다 이름이 덜 알려진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이 선생이 바랐던 바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0년 3월 13일, 선생은 72세의 나이로 꿈에 그리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치장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선생은 마지막까지도 '단결'을 당부했다고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묵묵히 밀어주고, 때론 조언과 충고도 아끼지 않은 대선배의 죽음에 김구 역시 크게 낙담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선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분열된 독립운동계의 통일에 더욱 매진한다.
▲ 이동녕 선생 거주지 앞에 선 청년백범 답사단
변량근
총선 앞둔 정치인들이 사표로 삼아야 할 위인
선생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정치인들이 사표로 삼아야 할 위인 1순위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들마다 치열한 경선을 치르고 있는 요즘 들어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서려고만 하는 이들, 젊고 능력 있는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4선', '5선' 타이틀을 갱신하기에만 급급한 이들이 국회에 가득하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불살라 보겠다는 의지와 열정도 좋지만, 자신보다 능력 있는 후배가 있다면 양보할 줄 아는 미덕도 필요하지 않을까.
선생의 거주지가 오래오래 보전되기를 기원하면서 우리는 도도히 흐르는 기강의 물결을 따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줄지어 살았다는 기강변을 걸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물결을 보니 임시정부 요인들이 불렀다는 <애국지사의 노래>의 한 소절이 떠올랐다.
양자강 깊은 물에 낚시 드리고
독립의 시절 낚던 애국지사들
한숨과 피눈물로 물들인 타향
아침꽃 저녁달이 몇번이드냐
- <애국지사의 노래> 中
▲ 임시정부 가족들이 줄지어 살았던 기강변
김경준
이동녕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때때로 기강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국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름을 달래지 않았을까? 그 모든 역사를 지켜보았을 기강을 뒤로 하고, 우리는 마침내 임정로드의 종착지인 충칭으로 향했다.
(*7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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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空港亭)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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