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그림
숲노래/최종규
정혜는 순자를 자기네 집 뒷간에 밀어넣고 말했어.
"여기서 이 달걀을 다 먹어.
그럼 밤사이에 병이 뚝 떨어질 거야."
동무들은 달걀 먹이려다 괜히 애먹이면 어쩌나 싶었지. (29쪽)
어쩌다 보니 순자란 아이는 곁에 피붙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에 덩그러니 혼자입니다. 말을 섞을 사람이 없고, 말을 걸 사람이 없습니다. 때 되어 밥을 먹으라느니, 심부름을 하라느니, 몸을 씻으라느니, 옷을 빨라느니, 이부자리를 깔라느리, 이불을 개라느니, 마당에 비질을 하라느니... 잔소리도 군소리도 살림소리도 사랑소리도 노랫소리도 들려줄 사람이 없습니다.
말을 걸어올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나서서 말을 할 일이 없습니다. 이런 나날을 보내는 순자는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을 심어요.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처럼 사느니, 삶을 마감하고 죽음으로 가는 길이 낫다고 여깁니다.
이때에 마을 또래는 순자한테 살그마니 다가가서 말을 섞어요. '하루거리'에 걸리지 않았나 걱정하면서, 또 순자하고 놀고 싶은 마음에, 또 스스로 배우고 살림하는 마을이란 터전을 얼결에 복닥복닥 가꾼다고 할까요.

▲ 속그림
숲노래/최종규
그때 분이 눈에 하얗게 열린 박이 보였어.
"잠깐, 얘들아! 어디 참인지 볼래?
순자가 참말 죽고 싶은지 아닌지." (41쪽)
삶이 아닌 죽음을 바라는 순자라는 동무한테 마을 아이들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엇을 해줄 만할까요. 그런가 하고 지나치면 될까요, 어른한테 이르면 될까요,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 여기며 귓등으로 흘리면 될까요, 벼랑에서 등을 밀면 될까요?
그림책 <하루거리>에 나오는 아이들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서로서로 이야기를 하고 자꾸자꾸 이야기를 합니다. 어떡해야 할까, 순자랑 동무로 지내고 싶은데, 순자가 별똥도 함께 보고 나무도 함께 타고 온갖 놀이도 함께 누리면 좋을 텐데, 참말로 어떡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지요.

▲ 속그림
숲노래/최종규
"어머, 순자 너 몸이 튼튼한가 보다."
"그거 먹으면 다 죽는데, 너만 안 죽는댜 야."
"우와, 순자 참말로 오래 살려나 보다!"
"다행이지 뭐야, 너 죽었으면 우린 어쩔 뻔했니?" (48쪽)
그림책을 일군 분 할머니는 지난날 어떤 하루를 보내셨을까요? 그림님 할머니는 순자였을까요, 아니면 여러 마을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을까요? 그림님 할머니는 어떤 눈빛에 마음으로 이녁 아이한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요?
그림님 김휘훈님은 어제를 바탕으로 오늘을 새로 들려주는 그림책을 갈무리했습니다. 마을 어른이 그냥그냥 보는 눈길이 아닌, 마을 아이가 차근차근 보는 눈길에서 피어나는 마음을 살짝 얹습니다. 근심걱정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즐겁게 놀이하며 나무랑 별하고 가까이 지내는 하루가 얼마나 즐거우면서 놀라운가 하는 발걸음을 가만히 옮깁니다.
흙빛을 담은 그림책입니다. 흙빛에 드리우는 별빛을 사랑하는 그림책입니다. 흙빛에 깃드는 빗물빛을, 냇물빛을, 바닷물빛을 꿈꾸는 그림책입니다.
▲ 책 끝자락
숲노래/최종규
▲ 그림님 김휘훈 님이 처음 마무리한 "하루거리". 얼핏 어두워 보이지만, 별빛을 담아 살아가는 아이들 마음을 수수하게 담은, 티없이 맑은 고요빛이었구나 싶다.
숲노래/최종규
앓는 사람한테는 하루가 그지없이 길며 끔찍합니다. 몸앓이도 몸앓이일 테지만, 마음앓이로 힘든 사람한테 하루는 가없이 까마득하면서 쓸쓸합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어떤 보금자리가, 마을이, 길이, 살림이, 사랑이, 노래가, 놀이가, 이야기가 되도록 보내는가요?
낮에 나무를 타며 매실을 따다가 나무를 쓰다듬으면서 큰소리로 말했어요. "우리 집 나무는 참 튼튼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지." 이 말소리를 들은 나무가 파르르 춤추면서 휘잉휘잉 바람을 불러서 머리카락을 쏴아아 날려 주더군요. 우리 입에서 터져나오는 모든 말은 오늘 하루를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하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별빛 같은 씨앗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하루거리
김휘훈 (지은이),
그림책공작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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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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