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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층 비서의 세계... '위력'으로 유지되는 그들의 관계

정치인, 기업인 등 고위층 '모시는' 비서의 삶... 피해에 쉽게 노출될 뿐 아니라 호소도 어려워

등록 2020.07.17 07:41수정 2020.07.17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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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6월 16일 오후 서울시장실에서 열린 '국토교통부 국·공유지 실효공고 관련' 환경시민단체 대표단 면담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폭력 혐의로 고소한 서울시 직원 측이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전형적인 위력 성폭력의 특성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위력'이란 개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고위공직자,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등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쥔 고위층과 이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노동자 사이의 위력이 잇따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법률용어로서 위력은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무형적인 힘"을 의미한다. "폭행·협박을 사용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경제적 지위" 역시 위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위력을 좀더 일상적으로 표현하면 '갑질' 정도로 대체할 수 있다. 갑을 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 차이가 일탈, 비위, 범죄 등으로 이어진다면 그 과정을 갑질, 위력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력은 성범죄, 폭행, 협박, 모욕 등으로 다양하게 발현된다.

더구나 고위층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이들, 넓은 의미에서 '비서의 세계'에 있는 이들은 위력의 상황으로부터 쉽게 노출돼 있다. 또한 피해가 발생해도 이를 호소하기조차 힘든 조건에 놓여 있다. 상관이 조직에서 정점 혹은 정점에 가까운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보좌하는 이의 업무 범위가 매우 모호하게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거절과 항의

지방자치단체장을 보좌했던 A씨(30대 남성)는 "공사 구분이 안 되는 게 가장 스트레스였다"라며 "어느 날은 근무시간 중 '부모님 좀 병원에 모시고 가달라'고 그러더라. 이 일 하면서 내 부모님도 병원에 못 모셔다 드렸는데 짜증이 확 났다"고 떠올렸다. 이어 "사모님에게 밉보여서 잘린 사람도 여럿 봤다"라며 "하지만 아무리 짜증이 나도 그걸 거절하고 항의하는 게 쉽지 않다. '아이 XX' 하면서 그냥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털어놨다.

현재 국회에서 근무하고 있는 B씨(40대 남성)는 "개 목욕시키고, 사모님 장보는 데 따라가는 등의 사례는 국회에서 유명한 일화"라며 "출퇴근 또한 모시는 분에 맞춰야 해서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를 문제제기한다면 아마 다시는 국회에서 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국회에서 근무했던 C씨(30대 여성)는 "국회의원-보좌진 사이가 아니더라도 국회엔 보좌관부터 막내 인턴까지 위력이 작용할 관계가 곳곳에 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라며 "특히 성적으로 피해를 입는 분들을 보면 여성 중에서도 어린 분들, 행정 관련 업무를 하는 분들, 여성 보좌진이 적은 의원실에서 근무하는 분들이 피해에 더 노출돼 있다. 위력에 더 노출되기 쉬운 분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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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를 이용해 비서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019년 1월 9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는 정치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업 총수나 그 일가가 벌인 각종 갑질은 위력에 의한 범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각종 갑질과 종근당·대림산업 고위층이 운전기사에게 보인 행태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연예인과 매니저 사이의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아래는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한 사례다.
 
임원 수행기사입니다. 임원이 입사 첫날부터 만나자마자 반말을 시작했습니다. 운전할 때면 바쁘다며 불법유턴을 요구했습니다. 하루는 "XX놈, 이 XX"라고 욕을 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담배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아침 7시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고 새벽에 퇴근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만두라고 합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신진희 변호사(대한법률구조공단 소속 성범죄피해자 전담 변호사)는 "지위 고하가 나눠져 있는 건 사회 구조상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지시 및 수행이 이뤄지면 된다"라며 "하지만 그 권력이 사적인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문제를 일으키면 갑질이 되는 것이고 그게 형법에서 규정하는 범죄라면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가해자가 고위직일수록 내부에서 피해 사실을 대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라며 "이러한 경우의 성범죄 피해자는 보통 한 번 정도는 조심스레 피해 사실을 주변에 털어놓곤 하는데 이때 제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더 입을 닫고 만다. 결국 그 조직을 떠나야 그나마 피해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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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한 혐의로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부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2019년 7월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마치고 법원을 떠나고 있다. ⓒ 이희훈


주변에 널리 존재하는 위력

이는 꼭 '비서의 세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직장갑질119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1주년을 맞아 지난 5일 발표한 직장인 1000명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을 때 대응을 묻는 질문(복수응답)에 62.9%가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라고 답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도 32.9%를 기록했다. '개인적으로 항의했다'는 49.6%였다.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라고 답한 응답자 중 67.1%가 그 이유로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24.6%가 '향후 인사 등에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19~55세 직장인 1000명 대상으로 2020년 6월 19~25일 구조화 된 설문지를 이용한 온라인 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p).

오진호 직장갑질119 집행위원장은 "억울한 일이나 괴롭힘을 당해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거나 불이익을 당할 것으로 생각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다수"라며 "참거나 모르는 척하지 않고 문제가 있으면 적극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신진희 변호사는 "위력은 우리 주변에 널리 존재한다. 본인 스스로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그게 폭행, 협박으로 발현되기도 하고 성범죄로 발현되기도 한다"라며 "사람마다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른데 아무런 고려 없이 '왜 이제 와서 그러냐'는 식으로 함부로 말하는 건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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