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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던 시대, 발트 3국 시민들 이끈 '노래 혁명'을 아십니까

[발트의 길을 걷다 2] 30여 년 전 '발트의 길'이 건네는 여전한 울림, 그를 이끈 주역들을 만나다

등록 2020.07.30 14:55수정 2020.08.1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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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은 과거에는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단어가 가진 느낌이 너무 부정적이라서 현재와 같은 어휘로 바뀌었다고 한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 의하면, 조현병이란 뇌신경계를 구성하는 신경회로들의 상호 작용에서 튜닝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뇌기능 저하 현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용어다. '조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는 소련 시절 정신, 즉 사상과 현실이 분열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었다. 뇌기능 저하 현상까지는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배우고 언론에서 듣는 것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괴리되는 현상과 사회적 상호 작용의 기능저하 현상이 자주 발생한 것이다(관련 기사: 30여 년 전 '발트의 길'이 건네는 여전한 울림)  

학교에서는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해서 배우며 이를 사실로 믿어야 했지만,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핀란드를 통해 송출되는 서방세계와 20세기에 실지로 벌어지는 상반된 현실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었고, 당시 사회적 담론이 빚어내는 대중의 신경회로들 속에서 유행어처럼 회자되던 '개방'과 '개혁'의 정의와 본질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다른 소련 지역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조치를 위한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누군가에는 그것이 '미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인들이 미친 행동이 가끔 천재적인 결과를 몰고 올 때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에 사는 광인들은 평화를 너무도 사랑했고, 50년간 변질돼갔던 사회를 튜닝하기 위해 거대한 피아노 줄처럼 그 길 위에 서기로 한 것이다. 

에드가르 사비사르(Edgar Savisaar)의 생방송 
 

각국 인민전선의 대표들, 맨 오른쪽이 에드가르 사비사르 발트3국의 인민전선들이 연합하여 결성된 발트총회를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 Rahvarinde muuseum

 
여기서 우리는 에드가르 사비사르(Edgar Savisaar)라는 제3의 인물을 만나야 한다. 그는 에스토니아 최고 정치적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현재는 정계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해 있지만 에스토니아 최대 보수당인 케스라콘드(Keskerakond, 중앙당)의 실질적인 당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 차례 주요 장관직과 수도 탈린의 시장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발트의 길'이 세상에 나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내가 이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여건상 인터뷰는 성사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몇 년 전 KBS 보도국과 일하는 과정에서 인터뷰 통역을 하느라 잠깐 인사를 한 적은 있다. 아마 나를 기억하진 못할 것이다. 에스토니아어를 하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인데 말이다. 

1988년 4월 13일이었다. 당시 에스토니아 최대의 인기 정치 토론 프로그램인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mõtleme veel)'라는 프로그램에 에드가르 사비사르가 출연했다. 1987년~1989년까지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각계각층을 대변하는 인물이 출연하여 토론을 벌이는 방송이었는데 녹화가 아니라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프로그램으로, 당시 소련 공화국에서는 상당히 생경하고 이례적인 포맷이었고 시청률도 높은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방송 출연 당시 정치인이 아니었으나 현재 재정부와 비슷한 에스토니아 인민 공화국 내 경제기획부 핵심인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언론매체에 정치적 성향 글을 많이 작성해 이미 사람들 사이에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정치적 관심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1987년 무렵부터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에스토니아 경제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개혁을 주장하여 에스토니아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기적의 프로젝트를 주장하다

에스토니아의 수상을 역임한 심 칼라스 (Siim Kallas), 경제학자 티트 마데 (Tiit Made), 사회학자 믹크 티트마(Mikk Titma) 그리고 에드가르 사비사르 등 네 명이 주축이 되어 주장한 '자주적인 에스토니아 프로젝트 (IseMajandava Eesti ettepanek)'는 에스토니아어로 기적(ime)이라는 의미와 같은 단어의 줄임말로 불릴 정도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는 당시 보수사회주의자들이 들으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시장경제주의 도입'과 고르바초프가 제안한 지대한 영향력의 광범위한 개혁 아젠다들을 제한적인 지역적 차원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공공 논의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일각에선 중세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마틴 루터의 활동과 비할 수 있을 만한 정치 행동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그 결과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이미 대내외적으로 에스토니아 내에서 정치적 후광을 입고 때를 기다리던 인물이었고, 그 방송 출연은 그 자신의 캐리어 뿐만 아니라 발트3국 현대사 흐름도 바꾸어 놓았다. 일반 시민들과 정당관계자, 심지어 공산당들까지 시청하는 그 프로그램에서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에스토니아 인민 공화국만의 독차적인 정치 시스템인 인민전선(Rahvarinne)의 조직을 제안한다. 
 

1988년 생방송을 통해 인민전선의 창설을 제안하고 있는 에드가르 사비사르 ⓒ www.virumaa.ee/04-13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만난 헤인즈 발크(Heinz Valk) 씨는 그의 발언을 이렇게 평가해 주었다.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과히 정치적 천재였어요. 주변상황과 맥락을 완벽히 파악한 상태에서 인민전선의 창설을 고안한 그의 발언은 반소련운동을 주도한 조직을 창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모스크바 당국에서도 그의 발언에 대해서 딴지를 걸 수가 없을 만큼 파급력이 있었지요."

명색은 소련의 정치적 사조를 편승, 그러나 속내는.....

즉 그가 주장한 인민전선 초기 명칭이 '(고르바초프) 개혁과 개방정책을 지지하는 인민전선'이었던 만큼, 당시의 소련의 정치적 사조를 편승하여 상당히 온건적인 정책을 표방한다는 분위기를 연출해 크렘믈린으로부터의 물리적인 압박을 상당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크씨 역시 이전 행보로 인해 정치적 대변인으로 인정받은 상태였으므로, 에드가르 사비사르와 함께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중역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발크씨 말에 의하면 그 방송이 끝난 직후 과히 폭발하듯 전국에 인민전선 지부가 결성되었으며 1988년 10월 전국 인민전선 설립회의에서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대표로, 헤인즈 발크는 예술총동맹 비서로 선출됐다고 한다. 

창립 초기부터 에스토니아 전역에서 22만 명 후원자가 모였다. 공식적인 정보만 봤을 때, 당시 에스토니아 전에 인구 140만명 중 22만명이 후원을 해주었다니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관심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잘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후원자들은 인민전선에 어느 정도 금액의 기부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1989년 8월 23일 발트의 길 행사가 끝난 후 연설을 하고 있는 하인즈 발크씨(가운데) ⓒ National Archive of Estonia

 
1988년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은 여름 노래대전 무대에서 4차례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다. 전국에서 버스와 차를 타고 30만 명이 참가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의 수가 수도 탈린 인구인 40만 명에 육박했다. 

'노래하는 혁명'의 시작

이들은 모여서 며칠 동안 소련 50년간 금지시켜왔던 에스토니아 국가 역시 힘껏 부를 수 있었다. 초창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개방과 개혁 정책을 지지하고 소련 시스템 속에서 자주권을 더 강화하자는 논제를 강조했던 만큼, 시민들의 열성적인 참여와 노골적인 반소련적 활동은 인민전선으로 하여금 걱정을 유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이 행사는 인민전선이 중심이 되어서 조직된 행사였지만 시민들에 의해 거의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행사였다고 하인즈 발크 씨는 말했다. 

하인즈 발크 씨는 에스토니아의 한 일간지에서 에스토니아인들이 부르는 이 자발적 투쟁의 멜로디를 '노래하는 혁명(Laulev Revolutsioon)'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것은 지금도 에스토니아와 발트3국의 독립운동을 지칭하는 대표명사로 사용되고 있있다. 

고르바초프 전까지는 노동당과 직업동맹에 가입하는 자유만 주어졌을 뿐 단체행동이 불가능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이후에는 이전과 달리 단지 금지곡을 부르는 것으로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이전엔 없던 표현,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주어졌다. 이 노래하는 혁명은 그런 파도를 타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정당 외 활동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노래하는 혁명'은 1988년 6월~7월 사이, 단 두 달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 사이 수 십 만 명이 모이는 행사가 네 차례나 이루어진 것이다.  농민, 노동자, 학자 등 최대한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인민전선으로 모였다. 그래서 짧은 기간 내에 폭넓은 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고, 이는 다음 해에 열리게 될 '발트의 길' 조직과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발트의 길에서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박물관에는 비록 사진속이긴 하지만 이렇게 손을 잡고 인간띠를 만들어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하인즈 발크 씨와 필자가 같이 손을 잡고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보았다. ⓒ 서진석

 
#발트의 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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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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