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우가 몰아치는 지리산 천왕봉 정상
고태규
사대부들이 사다리를 놓고 지나갔던 통천문과 고사목이 많은 제석봉을 거쳐,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11시였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으로 내려가는 주능선 등성이에는 야생화인 지리터리풀이 비바람에 휘날리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비바람을 동반한 안개가 남쪽에서 등성이를 넘어 북쪽으로 넘어가는 모습도 처음 보는 신기한 장면이었다. 제석봉의 고사목들이 안개에 쌓인 정경도 볼만했다.
아직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 장터목대피소에서 햇반을 사서 물에 말아 훌훌 먹었다. 옆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등산객들에게 나무젓가락도 얻고, 김치도 얻어먹었다. 나는 여행할 때는 자동으로 거지 근성이 몸에 배어서, 아무데서나 잠도 잘 자고, 아무 음식이라도 잘 얻어먹는다. 간식으로 단것만 먹다가 밥을 먹으니 살 것 같았다. 그저께 점심 때 들렀던 세석대피소에서도 이렇게 햇반을 먹을 걸...
11시 40분에 장터목을 출발하여, 하동바위를 거쳐, 2시30분에 백무동에 도착했다. 내가 오늘 걸은 이 코스는 1951년 12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 있었던 군경의 빨치산 토벌작전 때, 이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이 토벌대에 쫒기면서 이동한 코스와 똑같다. 이때 남부군은 악양면 소재지를 공격했다가 역습을 당하여, 거림골에서 출발하여 중산리-법계사-천왕봉-통천문-제석봉-장터목을 거쳐 백무동으로 도망갔다. 보름 만에 토벌대가 철수하자, 다시 거림골로 돌아왔다.
3일 전에 배낭을 맡겼던 슈퍼에 갔더니, 주인아저씨가 정색을 하면서 나를 반긴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3일째 내가 나타나지 않아서, 오늘 아침에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했단다. 경찰이 와서 내 배낭을 다 뒤져도 연락처가 나타나지 않아서, 국립공원관리공단에도 연락하고, CCTV도 다 뒤지고, 나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다.
내 실수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 배낭을 맡길 때, 내 전화번호를 드리고 왔으면 이런 사단이 안 났을 텐데. 며칠에 걸쳐서 지리산을 몇 번 넘나드는 등산 경험이 없었던 내 실수다. 주인아저씨에게 미안해서 짐 맡긴 값으로 만원을 드렸더니, 극구 사양하셨다.
여기 백무동 터미널에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자주 보던 동서울-함양-백무동 버스를 보니 반갑다. 오후 4시에 동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번 지리산 답사는 원래 20일 동안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다음 코스인 화순 운주사가 코로나 때문에 템플스테이를 안 한다고 해서, 운주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보름 만에 이번 답사를 마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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