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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의 길' 참가자의 회고 "이런 결과는 예상 못 했다"

[발트의 길을 걷다 7] '정치적 발명품'이 된 발트의 길

등록 2020.08.19 17:10수정 2020.08.1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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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엘켄 씨는 에스토니아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 60세가 넘은 노익장이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에너지와 활력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전시 활동을 하는 그는 과거 소련 시절부터 예술 활동을 꾸준히 해온 에스토니아 예술사의 산 역사다.

얀 엘켄은 다이니스 이반스나 헤인지 발크 씨처럼 인민전선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어간 참여자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 길을 걸어갔고 모래들이 모여 거대한 백사장을 이루듯 거대한 인간 띠를 만든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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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엘켄 씨는 과거 소련 시절부터 예술활동을 꾸준히 해온 에스토니아 예술사의 산 역사다. ⓒ 서진석


그는 현재 탈린 대학교 은퇴 교수로 재직 중이지만, 여전히 현역 화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는 '발트의 길' 행사가 열리던 당시에도 탈린에 살고 있었고 삼촌의 권유로 그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삼촌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얀 엘켄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들 이름도 똑같이 얀 엘켄이라고 지었다).

그는 그의 삼촌은 수년 전에 사망했지만, 삼촌 얀 엘켄은 단지 발트의 길에 참여하여 인간 띠를 만든 것뿐이 아니라 열성 당원으로서 조직에도 관여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인민전선의 핵심 인물이라기보다 인민전선 지시사항을 수행하는 안전요원을 역할을 하셨던 듯하다. 삼촌의 정치적 스타일로 인해 스탈린 사망 전에는 정치범으로 몇 차례 수형 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삼촌의 정치적 색깔을 만들어준 것 같다고도 했다. 

엘켄 씨는 발트의 길 당시에 찍은 사진을 몇 장 직접 보여주었으나 애석하게도 자기가 어느 구간에 서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기억하는 동선으로 따져볼 때 에스토니아 남부 어느 즈음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발트의 길을 준비하여 1989년 8월 29일 발트의 길을 준비하여 부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얀 엘켄 씨 ⓒ Jaan Elken



그의 가족들은 중앙아시아로 온 가족이 유형을 당하는 비극을 경험하기도 했다. 시베리아 강제 유형은 발트 3국 전체에서 1941년 6월과 1949년 3월 두 차례에 걸쳐서 이뤄졌는데, 정보기관 KGB에서 '인민의 적'이라는 사람들을 색출해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을 한밤중에 예고 없이 기차에 실어 시베리아의 낯선 지역으로 보내 버린 사건을 말한다.


소련 정권에 해로운 정치범들이나 사상범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 정치 활동이 불가능한 나이 어린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 역시 다수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볼 때 소련 지역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공포정치의 일환으로 실시된 일이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 상당수가 기차에서 유명을 달리하거나 현지에서의 악조건으로 사망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므로 극소수 사람들만이 스탈린 사후 고향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얀 엘켄의 가족들은 러시아 중부에 위치한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으로 유형을 떠났고, 얀 엘켄씨는 1950년 그곳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3년을 살다가 세 살 때 에스토니아에 돌아왔으니 그곳에 관한 기억은 많이 없다고 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는 그렇게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여러 문화와 민족이 섞인 지역이었다. 친척 중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에스토니아로 이주해온 경우도 있어서, 낭만적인 기억도 형성돼있는 지역이었다고 했다. 

서방 문화를 접하면서 형성된 반공주의

그는 어린 시절에는 러시아라는 나라와 사람들에는 개인적 악감정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어서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나 핀란드에서 송출되는 서방방송을 보고 바깥세상을 접하면서 사상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지만, 가정과 개인적 배경으로는 뚜렷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련은 거대한 감옥과도 같았다. 소련은 사람들을 마치 조현병과 같은, 질환에 걸린 사람들처럼 조종하고 통제하고자 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바보들처럼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다르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소련은 그런 시스템이었다. 

내적으로는 반공주의자였으나 예술가에게 주어진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외부적으로는 정부의 정책에 동조하는 척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예술가라는 특권이란 이탈리아 같은 서방세계에 방문하도록 주어지는 기회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는 금지돼있던 작품들도 에스토니아에서는 공공연히 작품화되어 전시될 수 있었다. 

이렇듯 그는 대외적으로는 정치적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나름 예술을 통해서 정치적 활동을 이어왔다. 예를 들어 당시에는 금지되어있는 에스토니아의 국기에 나오는 세 가지 색을 이용한 예술작품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성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예술작품도 소련의 레이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작품명 갈매기 서방으로 열린 창문을 의미하는 탈린과 헬싱키를 오가는 배를 배경으로 갈매기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있다. ⓒ Jaan Elken


정치적으로 문제시돼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가장 대표적인 그의 그림은 바로 이 작품 '갈매기'였다. 에스토니아는 소련 시절에도 서방으로 가는 배가 다니는 유일한 국가였고 탈린에서 헬싱키를 오가는 배가 매일 오가고 있었다. 서방으로의 열린 창문을 의미하는 탈린과 헬싱키를 오가는 배를 배경으로 갈매기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있다. 겉으로는 개방과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은 벽이 존재하는 사회적 상황을 풍자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정치적인 분위기가 강하다는 이유로 전시회 참여가 불가능해졌고, 심지어 그 작품이 걸릴 전시회가 취소되는 결과까지도 빚었다. 그리고 평단에서는 '자본주의의 벌레'라는 비평마저 쏟아졌다.

"자본주의의 벌레" 악평 받은, 풍자 담긴 이 그림  

당시 그가 정치적인 발언이나 활동에 더 열성적이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엘켄 씨를 비롯해 당시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정치적이었다. 발트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 발언과 활동을 벌일 준비가 되어있었고 특히 예술가들이 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가족이 겪었던 슬픔인 시베리아 유형에 관한 내용을 다룬 책이나 영화들도 개봉이 되었고 에스토니아의 신화적 세계를 차용하여 정치적 표현을 실현한 작품들도 쏟아져 나왔다. 이 모든 것들이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벌어지고 있던 일이므로 일반인들은 개방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노래하는 혁명과 발트의 길 같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마주하기 위하여 달음질했다. 

그는 발트의 길 이전 노래 대전 무대에서 열린 '노래하는 혁명' 행사에서 여러 차례 참여한 바 있었다. 소련에서 탱크가 올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공포감도 나름 조성되어있었으나 자신은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에스토니아 국기를 들고나와 노래를 불렀다. 흰색, 검은색, 파란색으로 수놓은 에스토니아 국기를 펄럭이며 금지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강한 믿음과 감동이 충만한 종교행사와도 같았다. 색과 깃발의 힘, 노래의 힘이 웅장한 은혜처럼 사람들 마음에 스며들었다. 

발트의 길은 회상해 보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영화에 출연한 기분이 들 정도라고 그는 전해주었다. 발트의 길은 동화와 같은 것이었다. 정말 마법과 같은 것이 벌어진 것이다. 
 

발트의 길을 기다리며 얀 엘켄 씨에게 발트의 길이란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 조우하며 연대감을 키우는 기회의 자리였다. ⓒ Jaan Elken


얀 엘켄씨의 회고 "발트의 길, 정치적 투쟁이 아닌 연대의 장소였다" 

그런데 얀 엘켄씨에겐 발트의 길이 정치적 투쟁이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단순히 가족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라는 이미지가 컸다고 그는 고백했다. 모든 친척과 가족들이 만나서 함께 만났으며 어찌 보면 거대한 이웃과 친척과도 같은 사람들의 한곳에 모여 손을 잡는 것으로, 소속감과 연대감을 고취시키는 거대한 예술적 행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발트의 길이 최종적 목적이나 결과물이 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어요. 독립으로 가는 절차 중 하나에 불과할 거라고만 생각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정치인들이 두는 체스판이었어요. 국민투표를 대신한 행사라고 봐도 되겠네요."

재능과 능력을 겸비한 이들이 발명한 정치적 발명품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도 그는 전해주었다. 이후에도 이러한 비슷한 행사들이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정치적 판수를 두었던 사람들이 어땠는지 파악하긴 힘들어요. 단순한 참가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독립으로 가는 여러 절차 중 하나에 불과했을 따름입니다."
#발트의 길 #얀 엘켄 #에스토니아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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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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