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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못 산다고 해, 잘만 살면서"

가족들 챙기느라 고군분투하는 전업맘의 정신세계

등록 2020.08.28 16:57수정 2020.08.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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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 고개를 돌리자 정신 사납게 쌓여있는 빨래바구니가 보인다.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 고개를 돌리자 정신 사납게 쌓여있는 빨래바구니가 보인다. Unsplash
 
이놈의 코로나가 다시 기승이다. 덩달아 집콕 생활도 다시 시작하며 더해지는 가사노동에 손목도, 팔도 또 슬슬 아프기 시작한다. 갱년기 불면증인지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만성 피곤은 기본이요, 표 나지 않는 집안일과 더위에 시달려 정신은 늘 몽롱하다. 아침에 눈을 뜨며, 오늘만큼은 쓰던 글을 기필코 마무리 지으리라 다짐하고 주섬주섬 정신을 챙겨 끈적거리는 공기를 헤치고 부엌으로 향한다.

식구들 아침을 챙겨주기 위해 뭔가를 씻고, 데우고, 팬에 부쳐 먹을 걸 내놓는다. 남편과 아들의 짧은 식사가 한차례 끝나고, 늦은 딸의 식사까지 옆에서 말동무하며 거들어 주고 나면 마음이 급해진다.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신 사납게 쌓여있는 빨래 바구니가 보인다.


입고 나갈 교복이나 셔츠가 없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탁기에 색깔별로 골라 돌려놓고 양치질을 하러 바삐 욕실로 간다. 양치질만 하면 이제 바로 글을 쓸 참인데, 아무래도 물때 낀 세면대와 욕실 바닥이 눈에 거슬린다.

"에라 모르겠다!" 솔로 박박 시원하게 문지르고 나니, 아직 낮 기온이 한껏 오르기도 전인데 난 이미 땀이 뻘뻘. 기운이 딸려 쉬어야 할 판이다. 선풍기를 켜고 땀 좀 식히며 잠시 눈을 감는데, 그 잠시를 내버려 두지 않고 확진자를 알려주는 구청의 알람이 울려댄다. 잠깐의 휴식을 훼방 놓는 구청이 괜스레 원망스럽다. 

개운치는 않지만 눈 뜬 김에 이제 슬슬 글 좀 써 볼까 식탁에 앉아 본다. 가까스로 집중하나 싶은데, 이번엔 택배 배달 초인종이 맥을 끊는다. 배달 온 물건을 받아 정리하고 식탁에 돌아와 다시 생각을 채찍질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다 돌아간 세탁기 알림음이 울린다.

"에그, 내가 못살아." 혼잣말로 구시렁대며 세탁물을 꺼내어 건조기에 밀어 넣고 다시 돌아와 앉으면, 머지않아 온라인 오전 수업을 끝낸 작은 아이가 "엄마, 오늘 점심은 뭐예요?" 하며 제 방에서 나온다.

나는 아직 배가 하나도 안 고픈데, 글은 끊겨 정처 없이 맴맴 돌기만 해 애가 타는데, 아이는 벌써 배가 고프단다. 에휴 큰 숨 한 번 내쉬고, 할 수 없이 일어나 또 숟가락과 젓가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오후 일과도 이런 식으로 대략 비스무리하다. 요즘 나의 시간들은 이렇게 쪼개지기 일쑤이다. 웬만해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만큼 할 수가 없다. 가족들의 원활한 일상을 위해 나의 시간은 불가피하게 난도질당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자꾸 뒤로 밀리곤 한다. 결국 글을 쓰기 위해 갈피를 잡았던 생각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쓰던 글은 힘을 잃고 중심을 못 잡는다. 

그렇게 집중해서 쓰지 못하는 날들이 하루 이틀 쌓이다 보면 슬며시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가족들이 집에서 부대끼는 게 부담스럽고, 언제까지 내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나 기약할 수 없음에 허망해진다. 나 한 몸 추스르면 고만이었던 미혼 시절이 몹시 그리워진다. 넉넉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 절절히 그립다. 앞으로 그런 시간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걸까? 


늦은 저녁이지만 하루 종일 우중충했던 기분을 날려볼 심산으로, 저녁식사 마무리와 집안 청소를 후딱 해치우고 서점으로 향했다. 비록 마스크를 써서 답답한 감은 있지만, 책들을 음미하며 산책하듯이 걷고 있으려니 요 며칠 만에 처음으로 기분이 가벼워진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역시 집을 나와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볼만한 책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여행 작가 우지경의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프롤로그가 눈에 확 들어온다.
 
나는 침실에서 서재로 출근한다. 서재로 가기 전 부엌에 들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 아웃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듣고 싶은 음악을 맘껏 틀어놓아도 되고, 일하다 말고 온라인 쇼핑을 할 때 누가 내 모니터를 볼까 봐 눈치 볼 일도 없다....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땐 언제든지 마실 수 있고, 점심도 원하는 시간에 먹으면 된다.

집에서 머무는 똑같은 일상인데, 삶의 질이 천지 차이다. 그야말로 내가 요즘 그토록 선망하는 삶! 아무도 챙기지 않아도 되고, 다른 이의 간섭 없이 온전히 자신의 리듬에 맞춰 시간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궁극의 자유! 그런 자유를 누리고 있는 저자가 너무나 부러웠다.

책은 코로나로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달래는 여러 방법들을 소개하는 내용인데,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부분은 바로 위의 구절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호사를 누릴 날이 있을까?

아이들이 있어, 가족이 있어 물론 행복하지만, 그들을 우선으로 챙기다 보면 때로는 오늘처럼 몸과 마음이 지쳐 예민해질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할 때 더욱 그런 심경이 된다. 가족들은 가만 보면 애증의 대상들이다.
 
    아이들이 있어, 가족이 있어 물론 행복하지만, 때로는 몸과 마음이 지쳐 예민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있어, 가족이 있어 물론 행복하지만, 때로는 몸과 마음이 지쳐 예민해질 때가 있다. Unsplash
 
아이들은 사랑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때론 고통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남편도 항상 옆에 있어줘서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답답한 구속이기도 하니 말이다. 세상사가 대개 그런가 싶다. 좋은 게 있으면 늘 그로써 기꺼이 감수해야 할 면도 꼭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여본다. 

다음 날, 또 글을 마저 써보려고 식탁에 앉아있는데 아들 녀석이 다가온다. 오거나 말거나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길도 주지 않는데, 녀석이 바로 옆으로 서더니 허리를 굽히고 검지 손가락으로 내 팔을 꾹 찌르며, 장난스럽게 물어본다.

"엄마, 글이 잘 안 풀려 괴로우세요?" 버젓이 알면서도 기어이 말을 거는 녀석이 얄미워 "그래, 요 녀석아. 괴롭다, 괴로워. 왜 또, 뭐? 뭐?" 하고 펄쩍 뛰었더니 녀석은 '푸하하하' 웃어제끼며 다 안다는 듯 팔을 벌려 내 등을 다독인다.

"이그, 내가 못 살아, 정말." 중얼대는데, 역시나 지지 않고 거든다. "맨날 못 산다 해, 잘만 살면서." 결국 녀석의 장난과 넉살에 예민했던 내 마음도 녹아내리고 함께 웃어버리고 만다. 가족은 역시 나를 가장 괴롭히는 애물단지들이지만, 그 애물단지들 덕에 오늘 하루도 웃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집콕 생활 #전업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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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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