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 대학병원의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들의 무기한 파업을 하루 앞둔 8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대한전공의협의회 관계자가 각 지역으로 보낼 종이 손피켓을 봉투에 담고 있다.
연합뉴스
여느 아이들과 출발점이 다른 그들에게 선민의식은 당연한 결과물일 뿐이다. 문제는 다른 아이들도 그것을 선선히 인정하고 당연시한다는 점이다. 여러모로 '잘난' 그들을 부러워할지언정, 그들에 대한 학교와 교사의 '배려'에 그다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합리적 차별'이라며 짐짓 두둔하는 경우도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었으니, 특권을 누리는 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고등학생들이 말하는 '공정함'이다. '공평하고 정의롭다'는 공정의 사전적 의미조차 아이들 사이에서 형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적은 애초 출발점이 달라 생겨난 결과일 수 있다고 지적하면, 반론이랍시고 공부 못하는 부잣집 아이도 여럿 봤다고 대꾸한다.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는 말엔 발끈하지만, 내심 모두 동의할 거라고 선선히 말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의대생들의 선민의식은 허물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공정의 의미가 얼마나 짜부라졌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수업 시간에 종종 기부의 필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기부는 타인을 돕는 '자선 행위'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모두가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의무'라고 잘라 말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고 여겨왔다.
"부잣집과 선진국을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마찬가지로,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와 후진국의 국민 역시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다. 그걸 단지 '운'이나 '복'으로 여기고 나 몰라라 하는 건 죄다. 그들과 기꺼이 내 몫을 나눠야 한다. 그래야만 공정하다."
놀랍게도 이 말에 선뜻 동의하는 아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가난에 대한 책임을 왜 애먼 자신에게 묻느냐는 반론과 함께, 그것이 대체 공정함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지적한다. 애초 그들에게 경쟁이 없는 공정은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심지어 나눔조차 공정에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의사이기 이전에 사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당최 가늠할 수 없다. 정책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파업을 벌이고 있는 의대생들의 선민의식만 나무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얼마 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갈등도, 나아가 학생부종합전형과 수능 사이의 논쟁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공정함이란, 어쩌면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삶에 대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없다면, 공정함은 오히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당사자 간의 투쟁을 불러오기 십상인 까닭이다. 신뢰가 부족하고, '아니꼬우면 출세하라'는 식의 조롱이 통하는 사회에서 공정은 그 의미를 잃게 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의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사회적 윤리 의식, 곧 공공성이다. 백 보 양보해서, 그들의 주장이 명명백백 옳다고 해도, 환자를 방치한 채 집단 파업에 나서는 건 공공성을 내팽개친 행태다. 거칠게 말해서, 의술을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만 활용하겠다는 선언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들 앞에서 공공성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공공성이란 그저 학생부 기록에만 활용되는 단어일 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학교는 의대 진학 여부에만 매몰된 채, 미래 의사로서 품성과 자질을 따져볼 겨를도 의지도 없었다.
이번 의사 파업을 통해 우리 국민 모두는 그들의 몸에 밴 특권 의식을 똑똑히 목격했다. 수능 점수가 높다고 좋은 의사가 되는 건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됐다. 아울러,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젊은 의대생들의 뒤틀린 가치관에도 혀를 내둘렀다.
공공성을 방기한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학교 교육의 결과다. 스스로 지난날을 반성하며, 앞으로 의대 진학 실적 따위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몇몇 동료 교사들도 맞장구치며, 아이들 앞에서 '의사이기 이전에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겠노라 약속했다.
사실 '의사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말은 파업을 시작하며 의사들이 앞서 내건 구호이기도 하다. 동료 교사가 말한 '사람'이 의사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의미하는 거라면, 파업 구호로 사용된 '사람'은 돈에 대한 욕심을 이해해달라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공정조차 경쟁을 통해서 얻어지는 거라고 여기는 아이들의 각박한 마음부터 녹이는 일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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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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