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태풍 불던 날 추락한 소녀... 사건 추적하며 만난 세 여성

[리뷰] 영화 <내가 죽던 날> 절벽 아래로 떨어진 소녀의 얼굴에서 형사가 발견한 것

20.11.06 11:11최종업데이트20.11.06 11:15
원고료로 응원

<내가 죽던 날>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인간에게는 두 가지 형태의 죽음이 있다. 먼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체의 죽음이다. 심장이나 뇌가 멈춰 그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두 번째는 정신의 죽음이다. 신념이나 믿음이 붕괴가 되면서 깊은 우울과 슬픔에 빠지게 된다. <내가 죽던 날>은 후자의 죽음을 말한다. 실종사건을 바탕으로 세 여성의 정신적인 죽음을 보여주면서, 여성 서사가 지닌 두 가지 장점을 결합하는 미덕을 선보인다.
 
남편의 외도를 몰랐던 현수는 갑작스런 이혼조정 재판에 절망을 느낀다. 이 고통의 늪을 빠져나오기 힘든 그녀는 일에 복직하면서 빠져나오고자 한다. 앞서 사고를 내며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위기에 처한 현수는 죄를 조금이라도 감경하고자 복귀 전 사건 하나의 마무리를 맡게 된다. 한 섬 마을에서 태풍이 불던 날 절벽 아래로 사라진 소녀.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인 세진은 그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주변에서는 확실한 마무리를 요구한다.
 
세진이 지내던 집으로 온 현수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건을 조사한다. CCTV를 보던 현수는 화면을 노려보는 세진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 절망과 고통에 빠진 표정이 현수의 얼굴과 같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현수는 세진의 사건을 세세하게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세진이 머무는 집의 소유자인 순천댁을 알게 된다. 동생의 자살을 경험한 순천댁은 그때의 충격으로 농약을 마셔 말을 할 수 없는 건 물론, 전신마비 장애를 지닌 조카를 양녀로 받아들인다.
  

<내가 죽던 날>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현수와 세진, 순천댁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무지(無知)했다는 점이다. 현수는 친구 민정의 다그침에 정말 남편의 외도를 몰랐다고 한다. 남편이 재판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후배와 현수가 바람이 났다고 소문을 냈다는 점도 현수는 몰랐다. 현수는 그저 무지했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래서 매일 자신이 죽은 것을 바라보는 끔찍한 악몽을 꾼다.
 
그 악몽은 세진 역시 꾸게 된다. 세진은 아버지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새엄마 정미와 세진은 그저 아버지가 주는 부와 사랑을 누리고만 살았다. 정미가 뒤늦게 그 정체를 알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처럼, 세진 역시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빠진 세진은 자신을 감시하는 집 안의 카메라들 사이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순천댁은 동생의 불안과 고통을 몰랐다. 장애를 지닌 딸을 혼자 키우는 동생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기에 그 자살에 충격을 받는다.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농약을 먹고, 조카를 키우지만 그저 죄책감에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 세 여성은 각각 남편, 아버지, 동생으로부터 받은 충격에 의해 정신적으로 죽게 된다. 남편과 아버지, 세진의 남동생과 그녀를 지켜준 경찰이 괴롭힘을 주는 요소라는 점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당하는 억압과 고통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내가 죽던 날>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이런 감정은 세 여성 사이의 공통점을 만든다. 여기서 영화는 이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현수는 화면 속 세진의 표정을 통해 동질감을 느끼고 그 실상을 알고자 한다. 다들 죽음으로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세진의 모습에서 그 진실을 찾고자 한다. 이는 현수가 희망을 찾는 과정과도 같다. 세진에게 가해진 폭력은 현수가 겪은 폭력과 같다. 현수는 세진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여기에 순천댁이 세진과 맺는 연대는 감정적인 격화와 함께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두 번째는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이다. 현수는 세진의 사건을 통해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어린 세진이 당한 것과 같은 고통에 자신이 무너지면, 또 다른 희생자만 생겨날 뿐이라 여긴다. 어른인 자신이 이 고통을 이겨내야 후대에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죽던 날>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이런 현수의 변화는 드라마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만든다. 이 작품은 장르적인 쾌감이 극대화된 연출을 선보이지 않는다. 스릴러나 미스터리를 강화해 재미를 주기 보다는 추리와 드라마를 통해 깊이를 선사한다. 정직한 추리의 과정은 세진의 과거를 추적하며 현수가 세진에게 어떻게 동질감을 느끼는지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이는 현수의 변화를 관객이 납득할 수 있게 만들고, 응원을 보내는 힘을 가져온다.
 
세세한 추리의 전개는 비밀을 하나씩 벗겨나며 섬세하게 감정을 보여준다.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면서 세 주인공에 깊게 동화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 두 번의 살인사건을 통해 모녀 사이의 연대와 치유를 말했던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범죄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븐> 이후 인상적인 여성서사를 지닌 범죄영화가 탄생했다고 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내가 죽던 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